정읍현감 이순신장군과 쌍화차
정읍현감 이순신장군과 쌍화차
  • 최재용 정읍시 부시장
  • 승인 2021.12.09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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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은 넓고 깊은 대지안에 맑을 물을 품고 있다가 필요한 때 땅에서 솟아나고, 채워주곤 합니다. 그런 샘을 대표하는 고을, 샘고을은 정읍의 다른 말입니다. 정읍에서 우리 역사를 대표하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행적을 살피다 보면 샘고을 정읍의 운명적 역할을 이해하게 됩니다.

임진왜란하면 충무공 이순신장군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불과 18일 만인 5월 2일 한양이, 6월 15일에는 평양성이 왜적에게 함락됩니다. 하지만 이 시기 남해바다에서는 이순신장군이 5월 7일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거북선이 실제 전투에 참여한 5월 29일 사천해전, 당포해전, 당황포해전 등을 거쳐 7월 8일에는 한산도 대첩을 이뤄냅니다. 이로써 왜군은 남해바다를 함부로 다닐 수 없게 되고, 전라도가 지켜지게 됩니다.

참고로 이날 7월 8일은 전주로 가는 길목인 인 ‘웅치’(마이산과 운장산 사이)와‘이치’(운장산과 대둔산 사이)에서 왜군의 전라도 진격을 포기하게 만든 웅치와 이치전투가 있던 날이기도 합니다.

이순신장군이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부임한 것이 임진왜란 1년여 전인 1591년 3월인데, 그때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입니다. 이순신장군이 정읍현감을 지냈다는 점은 많은 사람이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순신장군은 어떻게 정읍현감으로 오시게 되었을까? 또 무슨 일을 하셨을까 하는 대목은 자못 궁금증을 자아내기 충분합니다.

1576년 32세의 이순신은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주로 함경도나 전라도 외곽의 국방 업무를 맡습니다. 특히 42세 때인 1586년에는 두만강 하구 녹둔도의 책임(종4품)을 맡게 되는데 이듬해 모함을 받아 직위해제 되고 처음으로 백의종군하게 됩니다. 이후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45세 때인 1589년 12월부터 1591년 2월까지 1년 3개월 동안 정읍현감(종6품)을 지낸 것입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한 후, 지역의 뜻있는 분들이 성금을 모아 일제가 세운 신사를 허물고 이순신장군을 모시는 충렬사를 지금의 정읍시청 옆에 세웁니다. 1949년 8월 공사를 시작했으나 6·25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963년에야 준공되었다니 더 애틋함이 묻어납니다.

이순신장군이 당시 근무했던 정읍현 관아는 지금의 정읍시 장명동주민센터와 정읍경찰서, 정읍여중 일대로, 현재 주민센터 앞에는 관아 터였음을 알리는 표석이 있습니다. 이순신장군이 당시 정읍현감으로 계시던 시기에는 이미 왜적의 침략이 어느 정도 예견되던 때였을 것입니다. 평생 충직한 선비의 길을 걸었던 분이기에 정읍현 관아에서 업무를 보면서도 그런 왜적의 침입과 대책을 고민하셨을 것입니다.

당시 정읍현 관아의 앞은 지금 정읍 쌍화차 거리가 되었습니다. 이순신장군은 그 시절 정읍 옹동의 숙지황을 넣고 정성스레 다려진 쌍화차를 드셨을지도 모릅니다. 이순신장군은 충직한 성품과 용맹함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시기 질투로 모함을 받고 엉뚱하게 고초를 겪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피폐해졌던 마음과 건강을 마지막으로 돌보고, 임진왜란 8년 동안 국난극복의 지혜와 힘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정읍과 정읍의 쌍화차가 드렸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어느새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기입니다. 정읍시청 바로 옆에 있는 충렬사를 둘러보고, 장명동주민센터가 있는 옛 정읍현 관아터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당시 이순신장군의 마음을 헤아려보면 어떨까 합니다. 그리고 이순신장군이 걸었을 쌍화차 거리를 걸어보면 좋겠습니다. 추워진 날씨에 몸을 따뜻하게 하고, 원기를 돋우는 쌍화차를 한 잔 마시게 되면 2022년 임인년 새해는 좀 더 힘있게, 뜻한 바에 한발 더 다가설 수 있을 것입니다.

최재용<정읍시 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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