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에게 요한나가 없었다면
고흐에게 요한나가 없었다면
  • 송일섭 염우구박인문학교실블로거
  • 승인 2021.12.08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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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는 1853년에 네덜란드의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성직자가 되고 싶었지만, 신학대학에 낙방하면서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밀레처럼 가난한 노동자들의 생활 모습을 그리기로 하고 독학으로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1885년 〈감자 먹는 사람들〉(1885)을 완성하고 그 이듬해 구필 화랑에서 근무하는 동생 테오를 찾아 파리로 왔다. 어둡고 칙칙한 화풍에서 밝은 화풍으로 바꾸었다. 파리의 도시 생활에 지친 그는 프랑스 남부 아를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또한, 고갱을 만나 동거하면서 새로운 열정에 들뜨기도 했다. 그러나, 작품에 관한 토론이 과열돼 마찰을 빚게 되자 고갱은 그의 곁을 떠나고자 했다. 고흐는 고갱을 붙잡고 싶어서 “사려 깊은 결정을 내려주길 바란다.”라며 사정하기도 한다. 거절당한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잘라버렸고, 이를 보고 놀란 고갱은 떠나고 말았다. 고흐는 자신의 잘린 귀를 들고 술집으로 뛰어 들어가 여급에게 건네며 “조심히 다뤄!”라고 소리치고는 쓰러졌다고 한다. 이후 그는 요양원에 들어갔고 발작을 하기 시작했다. 다시 건강이 회복되어 그림을 열심히 그려 〈까마귀 나는 밀밭〉 등 70여 점의 유화를 그렸다.

그러다가 1890년 7월, 고흐는 들판에서 권총으로 자신의 가슴을 쏘았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동생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에 이틀 후에 숨을 거두었다. 숨 막히는 무더위 속에서 동생 테오만이 빈센트의 관을 묵묵히 따랐을 뿐이다. 테오의 손에는 끝내지 못한 형의 마지막 편지가 쥐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래, 나만의 일, 그것을 위해 내 삶을 위험에 몰아넣었고 그것 때문에 이성의 절반은 암흑 속에 묻혀 버렸다.”

이렇듯 광기로 그림에 빠져들었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그렸지만, 당시의 그에 대한 평가는 가혹하리만큼 냉혹했다. 879편의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이렇다 할 그림 하나 제대로 그리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은 그를 ‘태양의 화가’, ‘지상에서 유배된 천사’, ‘광기의 천재’ 부르면서 그의 삶과 작품을 흠모하고 있다. 그를 헌신적으로 지원했던 동생 테오마저 6개월 후에 죽고 만다.

여기까지만 보면 고흐는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한갓 무명화가에 불과했다. 이런 고흐가 어떻게 해서 오늘날 불멸의 대작가로 부상했을까. 거기에는 또 한 사람의 숨겨진 공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바로 그 사람이 고흐의 제수(弟嫂) 요한나다. 그녀는 동생 테오의 아내다. 요한나는 남편 테오가 죽은 빈집에 고흐의 그림과 편지가 가득 남겨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요한나는 고흐의 그림과 편지를 모두 수습하여 네덜란드로 떠난다. 요한나는 네덜란드에서 하숙집을 운영하면서 고흐의 그림을 알리기 시작했다. 8년 동안 스무 차례나 전시회를 하면서 고흐의 인지도를 높여간다. 그뿐만 아니라,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668통의 편지글을 뽑아 ‘반고흐, 영혼의 편지’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이 책을 통해서 고흐의 광기 어린 인생과 예술혼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의 가난과 어려운 삶, 그리고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렸던 고흐의 삶은 ‘천재적 화가’의 면모로 일신했다. 물론 그가 남긴 그림들은 최고의 명화로 재평가되었다.

만약 고흐에게 그의 요한나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의 동생 테오의 공도 빼놓을 수 없다. 형이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도록 뒷바라지한 공로가 크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고흐의 천재성과 테오의 지원을 자주 언급하면서도 고흐를 ‘광기의 천재 작가’로 일으켜 세운 요한나의 공로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송일섭 염우구박인문학교실블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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