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11월의 풍경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11월의 풍경
  • 이소애 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21.11.16 16: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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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아파트 화단에는 봉선화가 열댓 그루 있었다. 아파트를 드나들며 봉선화와 눈인사를 나누며 올여름을 보냈다. 봉선화 붉은 꽃을 바라보면 옛 친구가 생각났었다. 더위가 가시기 시작하자 손을 대면 툭 하고 터질 것 같은 열매 주머니를 건드리고 싶은 장난기도 일었다.

손톱을 곱게 물들이기 위해 백반을 넣고 돌로 콩콩 찧으면 내 곁에 쪼그리고 앉아있었던 친구는 돌아오기 위해 은하수로 떠났다. 우린 서로 손가락에 아주까리 이파리로 쌓아 무명실로 동여매던 장독대 옆에서의 끈끈한 정을 나누었다. 우주의 별을 세는 대도 3천200년이 걸린다는 데, 빛의 속도로 달려간다 해도 만날 수 있을까? 차라리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는 친구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11월은 온통 색의 계절이다. 한 줌의 햇살이 붓을 들고 풀과 나무를 무지개색으로 그림을 그리는 계절이다. 하루가 다르게 색을 덧칠한다. 화단의 봉선화도 점점 누렇게 시들어 가고 있었다. 노쇠해지는 봉선화를 보노라면 저절로 노래가 생각에서 오선지를 긋는다. 쓸쓸한 표정에서 “낙화로다 늙어졌다”라는 노랫말이 흘러나온다. 나이 듦의 즐거움은 마치 퍼즐을 맞추듯 아슬아슬하게 행복을 찾아 즐긴다. 나이 듦은 생이 점점 숙성하는 것이리라.

엊그제가 입동(立冬)이었다. 겨울의 시작이라는 절기여서 동면하는 동물들이 땅속에 굴을 파고 숨기 시작한다. 오며 가며 내 손톱에 물든 봉선화는 옛 친구의 모습으로 나를 붉게 가슴에 스며들었다. 용케도 11월을 무난히 넘기는 늙은 봉선화가 처량해 보였다. 첫눈 오는 날까지 꽃밭에서 살아 있기를 바랐다. 마치 봉선화의 운명이 내 삶의 그림자 같아서일까. 입동인 그날. 봉선화는 꽃밭에서 흔적 없이 사라졌다. 봉선화는 돌아오기 위해 떠났다. 섭섭함도 잠시 봄이 오면 파릇파릇 돌아올 거라는 기다림이 있었다. 씨앗을 부지런히 터트리는 아름다운 소리가 열매 주머니에서 들렸기 때문이다.

갑자기 사라진 봉선화처럼 자칫 글쟁이들도 글을 창작하면서 즐기는 행복을 인공지능에 빼앗기지 않을까 우려된다. 사람처럼 이미지와 문장을 통합적으로 인식하고 자유롭게 교차 구현할 수 있을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불안감이 있다. 문장을 입력하면 인공지능이 자동으로 소설이나 시를 구현해내는 미래의 세계가 오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때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외로움과 고독을 어떻게 이겨낼지 생각해 본다.

생각만 해도 두려운 ‘가족 대여 서비스’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엄마와 딸, 남편과 아들, 며느리 역의 서비스로 만족해야 할 시대가 오지 않을지 불안하다. 남편 역과 며느리 역의 두 사람이 찾아와서 식사하는 행복감으로 자신의 감정을 치유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11월을 걷다 보면 모든 아름다움이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감탄할 때마다 물들어가는 풍경은 저마다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고 손짓한다. 그래서인지 11월의 풍경은 쓸쓸하게 아름답다.

우린 신뢰한다. 왜냐하면 매년 11월은 왔다가 떠나는 경험을 했으며, 앙상한 나뭇가지에서 푸른 생명으로 돌아왔음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미국 경제학자이자 사회과학자인 토르스타인 베블런(1857-1929)은 『유한 계급론』에서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음을 남들에게 증명하는 최고의 방법은 그 돈이 자신에게 아무 소용없다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라고 한다. 상류계급 들은 금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과시적 여가, 과시적 소비로 생활수준을 결정하는 금력을 나타낸다. 취미생활과 의복, 화려한 주택 등으로 금력 과시 문화를 표현한다. 아파트값으로 자기 존재의 위치를 과시는 현실에서 경험하는 싸늘한 분위기. 그런 사회에서 적응하려면 주눅이 들기 전에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녀본다.

시인은 미래에 닥쳐올 불안에서 벗어나 여유로운 시간을 소유하는 일이 꿈이다. 우주를 넘나드는 생각의 자유로 『그리스인 조르바』의 댄스를 즐기는 기쁨. 그 기쁨을 위하여 11월의 풍경은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

이소애<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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