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독립운동가 - 홍만식, 이상철, 김봉학, 이건석 선생
11월의 독립운동가 - 홍만식, 이상철, 김봉학, 이건석 선생
  • 전북동부보훈지청
  • 승인 2021.11.01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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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포스터

을사늑약에 죽음으로 항거한 4인의 순국지사
 

홍만식, 이상철, 김봉학, 이건석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죽음으로 부당함을 알리고 순국한 열사들이다.

홍만식 선생은 갑신정변 이후 20년간 여주 시골집에서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1905년 11월 17일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이에 순국으로 일생을 마감할 것을 결심하였다. 의관을 차려입고 부친의 묘소에 사별 인사를 드리고 다시 돌아와 사당에 인사를 드린 후 아들에게 독약을 타서 올리라는 명을 내렸다, 자식과 조카에게 굳은 의지를 말하고 아무 일 없는 듯이 단정히 앉아 약을 삼키고 순국하였다. 순국일은 1905년 11월 28일이었다.

홍만식의 순국은 민영환의 순국보다 하루 이상 빨랐으며, 고관을 지낸 인사의 순국으로서는 가장 이른 편에 속한다. 정부는 1962년 홍만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상철 선생은 전라남도 영암군 출신으로 1876년에 태어나 1904년 9월 학부 주사에 임명되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밤늦게까지 통곡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민영환과 조병세가 자결 순국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그들의 뒤를 이어 12월 3일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고종은 이상철의 뜻이 가엽고 그의 절개가 가상하니 관(棺) 제작용 목재를 내려주고, 특별히 학부(學部) 협판(協辦)에 추증토록 하고, 정문(旌門)을 세워주도록 하였다. 정부는 1962년 이상철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김봉학 선생은 1871년 황해도 중북부에 위치한 황주군 청룡면에서 태어났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김봉학은 군인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자결 순국하기 이전에 먼저 일제의 한국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려 하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일이 누설되었고 김봉학은 체포를 면할 길이 없음을 알고 자결했다고 한다.

1905년 12월 4일 고종황제는 김봉학이 나라를 위한 근심과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목숨을 바쳐 절개를 세웠음을 기특하게 여겼다. 이에 조령을 내려 그를 법부 참서관(參書官)에 추증하고 정문(旌門)을 세워주는 특전을 베풀게 하였다. 정부는 1962년 김봉학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건석 선생은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황암리에서 태어났다. 을사늑약 이전인 1905년 10월경 이건석 등은 을사늑약 직전 고종황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속 상소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경운궁 대안문 앞에 엎드려 일본과 조약을 체결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려 하였다. 결국 이들의 상소문은 일본군의 방해로 비서원을 통해 고종에게 전달되지도 못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11월 16일 이석종·이건석을 비롯한 상소의 주모자 13인을 체포하여 투옥시켰다.

선생은 일본군사령부에 체포된 후 엄한 심문을 받았으며 사령부로부터 회유성 제안을 받았지만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1906년 5월 10일 옥중에서 피를 토하고 순국하였다. 정부는 1963년 이건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전북동부보훈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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