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와 정읍의 빚, 그리고 대흥리마을
백범 김구와 정읍의 빚, 그리고 대흥리마을
  • 최재용 정읍시 부시장
  • 승인 2021.10.05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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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문화와 역사에서 정읍의 역할과 존재감은 남다르다. 예컨대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가요 정읍사(井邑詞)의 반주 음악이었던 정읍(井邑)은 수제천(壽齊天)이란 별칭과 함께 지금도 널리 연주되고 있다.

근현대사에서도 정읍은 막연한 짐작 그 이상이다. 1894년 부패한 나라를 바로 잡고, 외세의 침탈을 물리치고자 일어난 갑오동학혁명의 출발점이 정읍이다. 일제의 폭력과 수탈에 맞서 치열하게 전개된 항일운동은 종교계와도 연계되었는데 역시 정읍과 관련이 깊다.

1920년부터 1940년까지 당시 국내 한 일간지에 보도된 항일기사에 대한 분석자료를 보면 총 254건의 사건이 있었고, 이 중 60%인 147건이 보천교와 관련된다. 나머지는 천주교 2건, 불교 18건, 기독교 23건, 천도교 32건 등이다. 또한 국가기록원이 보유한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중 보천교 관련 건수가 중복을 제외하면 총 321건이나 된다. 도대체 보천교는 어떤 종교였을까?

월곡 차경석이 출범시킨 보천교의 뿌리는 동학으로 보인다. 1905년 손병희선생에 의해 동학이 천도교로 재조직되고 두 해쯤 지날 무렵인 1907년에 월곡 차경석은 증산교를 창시(1901년)한 증산 강일순과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된다. 이후 1909년 증산교의 조직 운영의 책임을 맡게 된 월곡 차경석은 같은 해 증산 강일순이 사망하자 1911년에 정읍 입암면 대흥리 자신의 집에서 강증산의 부인 고판례를 교주로 삼아 보천교(당시는 태을교로 불렸고, 1922년 일제의 강압으로 보천교로 등록)를 출범시킨다.

참고로 1920년 당시 국내에 와있던 미국 총영사관 Miller가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 보천교 추종자가 6백만 명에 이르렀다는 내용이 있다. 당시 우리나라의 인구는 2천만 명 정도였다. 또한 보천교 본소는 2만평 규모로 경복궁을 옮겨온 듯한 모습인데, 당시 쌀 30만 가마에 상당하는 엄청난 비용을 들여 건축했다고 한다.

하지만 1936년 보천교 교주인 월곡 차경석이 죽자 일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보천교에 대한 해산명령을 내리고, 주요 건물들을 철거하거나 공매 처분했다고 한다. 이때 보천교의 본당인 십일전은 서울 조계사의 대웅전이 되었고, 정문인 보화문은 2012년 화재로 소실된 내장사의 대웅전이 되었다고 한다.

해방 후 정읍을 방문한 백범 김구선생은 임시정부가 정읍에 빚을 많이졌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여러 해석이 있겠지만 연구자들은 대체로 보천교와 관련이 깊은 것으로 여긴다. 보천교의 흐름을 살펴보다 보면 고당 조만식선생, 단재 신채호의 부인 박자혜여사, 백야 김좌진장군, 백범 김구선생 등 우리민족의 독립운동을 만난다. 또 정읍농악을 이해하게도 된다. 종교적 성격 논쟁과는 별개로 항일독립운동과 민족종교로서의 역할 관점에서 볼 때 보천교가 갖는 의미는 남다른 것이다.

보천교 중앙본소는 정읍 시내에서 승용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입암면 대흥리마을에 있다. 현재의 건물은 월곡 차경석선생이 주로 기거했던 가옥과 주변 건물이라고 한다. 보천교 중앙본소 외곽 담장에는 유약을 발라 구운 황색 기와도 어쩌다 눈에 띄는데 여러 가지 추측과 상상을 하게 만든다.

대흥리마을은 농촌마을인데도 고압 전선이 있고, 섬유공장 건물과 가정집이 혼재되어 있으며, 골목길 담장 중에는 성벽같은 구조물이 어색하게 포함되어 있고, 큼직한 하수구가 마을 골목 구석구석에 있다.

일제침략기 최대의 민족종교였던 보천교가 있던 대흥리마을은 둘러볼수록 흥미롭다. 뭔가 깊은 사연을 담고 있음이 분명하다. 정읍시에서는 작년에 대흥리마을의 문화를 기록한 마을지를 출간토록 지원했고, 올해 초에는 접지리에서 대흥리(大興里)로 마을의 본명을 되찾아 드렸다.

최재용<정읍시 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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