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저항하기보다는 바람을 사랑하는 법
바람에 저항하기보다는 바람을 사랑하는 법
  • 이소애 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21.09.09 16: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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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강과 만나는 뚝방길을 걷노라면 갈대숲과 억새를 만난다. 강바람이 몰아치는 강변길은 금방 부러질 듯 옆으로 눕는 하얀 빛의 부스러기가 눈부시도록 아름답다. 갈대인가 하면 억새가 몸져누웠다가 스스로 일으켜 세우는 모습에서 신기한 지혜를 만난다. 바람에 맞서 싸울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며 생존하는 갈대는 극복하면 살 수 있다는 메시지가 있다.

갈대는 줄기 속이 텅 비어 있다. 그래서 쉽게 바람에 꺾이지 않는다. 그러나 줄기 속만 비어 있다고 몸을 지탱하는 게 아니다. 갈대가 혼자서 댕그라니 살아가는 게 아니다. 서로 아픔을 위로해 주고 격려하면서 바람을 이겨낼 수 있도록 서로 모여서 산다. 협동심이 대단하다.

갈대는 아무리 강한 바람이 불어도 흔들릴 순 있지만 주저앉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생존하는 방법은 바람을 사랑하는 거였다. 방향에 따라 요리조리 먼저 누워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함께 누리는 일이다.

가을이 성큼 다가온다. 가을을 부여잡고 핀 코스모스의 가녀린 색이 흔들릴 때마다 썰물처럼 빠져나갈 여름 뒷모습을 상상해본다. 가을바람 소식은 아파트 나무들에서 먼저 접한다. 같은 나무에서 떨어진 잎을 본다. 제각각 색과 잎의 상처와 모양이 다른 낙엽을 바라보노라면 마치 병실에서 신음하고 있을 환자들을 보는 것 같다.

가을 문턱에 들어서면 “떠남”의 아름다움을 맞이한다. 나무는 몸에 지닌 잎과 열매를 익히고 나면 한 해의 생을 마감한다. 인간처럼 영원한 이별이 아니다. 그래서 세찬 바람이 불 때 나무에서 낙엽들의 찬란한 군무를 보고 가을이 아름답다고 한다. 왜냐면 다음해도, 아니 내가 지구상에서 숨을 쉬고 있는 동안에는 또 봄이 온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를 껴안을 수 있으며 나무와 속삭일 수 있다고 확신한다.

‘2021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요즈음 여성은 공포의 분위기에 위축되어 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악랄한 폭력과 살인 등의 범죄가 계속 보도되면서 여성들의 불안감이 커졌다. 군에서도 마찬가지다. 공군 성폭력 사건 이후 군 사법개혁 논의를 한다는데 소식이 깜깜이다. 여성 대상 범죄와 가해자 검거 건수가 늘고 있는 것을 방송이나 신문을 보면서 과연 대한민국이 범죄로부터 안전하다고 여기는 여성이 몇 명이나 될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자녀들이 집을 떠나 외지에서 환경이 열악한 숙소에 기거하기 때문이다.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주택이 취업 여성에게 위험을 초래하는 생활을 하도록 한다. 여성 폭력 검거 건수가 2011년과 비교해 7.3배 수준이라니 어찌 불안하지 않겠는가.

성폭력 사건 발생 건수가 2010년보다 1.5배 증가했다. 3만 1,400건(2019년) 증가한 현 사회에서 여성이 숨을 쉬며 몸 붙이고 산다. 여성 고령층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 의한 여성 살해 분석’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97명의 여성이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 가운데 45명의 가해자가 남편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가정폭력의 대상이 아내, 여성이라는 피해자로 내몰리는 현 사회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해 볼 일이다.

아슬아슬한 삶을 평화롭게 누리기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묵상해 본다. 신발이 나를 끌고 다니기 전에 나의 존재감을 바람에 띄워보자. 오늘 내가 남을 위하여 봉사하는 일이 무엇인가? 남을 미소 짓게 하는 행동은 어떤 일인지 크게 말고, 작은 기억을 되살려 행동으로 옮긴다면, 바람을 사랑하는 법을 실천하며 사는 거다.

바람에 저항하다가 부러지는 나뭇가지가 아니라, 갈대처럼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생각을 눕히며 사는 사람, 그렇게 살기 위해 오늘도 고민해 본다.

이소애<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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