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바다를 볼 수 있는 물고기, 날치
살아서 바다를 볼 수 있는 물고기, 날치
  • 이소애 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21.08.12 14: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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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바다를 누비고 다니는 날치에게 말한다. 아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쭉쭉 위로 올라가서 땅을 내려다보는 사람들의 고고한 시선에 손짓한다. 마치 개미처럼 오가는 인간의 이동은 눈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발걸음 소리만 상상으로 떠올릴 것이다.

날치는 하늘을 나는 물고기다. 살아서 바다를 볼 수 있는 물고기다. 가슴지느러미를 파닥거리며 물을 차고 날아오르는 마법을 부린다. 날치는 하늘로 치솟으며 무슨 생각을 할까. 아름다운 활공의 모습에서 창공을 누비는 새처럼 되어야겠다고 지느러미를 만지작거리지 않을까.

날치는 지느러미가 수면 밖으로 나왔을 때 날개로 변신한다. 이 놀라운 변환은 지느러미로 공기 속을 비행하는 날치의 생명력에서, 삶의 끝자락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가를 말해준다.

날치는 시속 70㎞의 속도로 40초 동안 400미터가량을 날 수 있다. 가슴지느러미를 파닥거리며 물을 차고 바다 위로 오른다. 날치가 처음 바다에 등장한 것은 공룡이 사라진 약 6,500만 년 전 신생대 에오세 때라고 한다. 참치와 같은 천적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날치의 점프는 점점 진화되었을 것이다. 날치는 바닷속에서 도망칠 수 없는 위험에 이르렀을 때는 반드시 다시 바다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왜냐면 날치는 물고기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높이, 멀리 난다고 한들 물을 떠나서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닭과 타조, 펭귄도 날지 못하는데 날치는 왜 날아오를까 궁금했다. 살고자 하는 간절한 욕망과 환경이 지느러미를 진화시켰다.

“가난한 사람은 부정식품이라도 먹을 수 있게 선택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말은 하늘 높은 곳에서 인간에게 내뱉는 소리로 들렸다. 모 대선주자의 발언이었다.

『말의 품격』의 저자 이기주는 “사람의 체취, 사람이 지닌 고유한 인향(人香)은 분명히 그 사람이 구사하는 말에서 뿜어져 나온다”라면서 나의 말은 누군가에게 꽃이 될 수도 있으며 창이 되기도 한다고 한다며, 말은 입에서 나오지만 천 사람의 귀로 들어간다며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품격이 드러난다고 한다.

돈이 없어서 라면 한 봉지로 두 끼를 해결하면서도 질 낮은 음식을 배부르게 먹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는 아르바이트생의 고백이 날개를 달고 날았으면 좋겠다. 사람과의 만남이 생존의 확률을 높인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과의 만남에서 뇌파동 동기화를 위하여 눈을 보고 대화를 하라고 권유하는데 코로나19가 가로막고 있는 세상이 되었다.

사막의 뜨거움이, 사막의 모래바람이. 사막의 어둠이 요즈음처럼 무서우랴. 숨을 쉰다는 고마움을 느끼기 전에 내 몸을 마스크가 감시하고 있다. 헐떡거리고 있다.

생존을 위하여, 비참해지지 않기 위하여 글을 쓰는 시인은 고흐의 자학적인 행위처럼 시를 쓴다. 통증을 느껴야 자기 인식을 하듯 고통을 이겨내기보다는 함께하는 지혜를 터득해 본다.

날치가 지느러미를 날개처럼 펴고 활공하듯, 활공하면서 물고기가 처해 있는 바다의 색과 파도 소리를 들여다보듯, 사람도 생존을 위하여 어깨를 펴고 세상 밖으로 뛰어보는 것이다. 세상의 변화 속도를 따라가기 위한 훈련과 잠재력 1인 가구로 사는 맛을 체험해 본다.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고통이 고통에게 말을 건네면/ 첫 키스처럼 뜨거워질까요// 사랑은/ 아파할 줄 아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신의 선물// 나는 고통을 사랑합니다// 장미의 향기가/ 날카로운 가시에서 피어나듯/나의사랑도/고통의 무늬였습니다 <고통이 고통에게> 전문

이소애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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