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XYZ세대’
‘86, XYZ세대’
  • 나영주 법률사무소 신세계 대표 변호사
  • 승인 2021.07.20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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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주 법률사무소 신세계 대표 변호사
나영주 법률사무소 신세계 대표 변호사

02학번 필자의 대학교 시절 이야기다. 문학동아리 활동을 2년째 하고 있던 우리 학번은 동아리 행사를 주관하는 이른바 ‘주체학번’이 되었다. 1년의 동아리 활동과 행사를 점검하면서 새로운 마음을 다지기 위해 동아리방 청소를 대대적으로 하였다. 묵은 책들이 넘쳐났다. 수평 남짓한 동아리방을 가득 채운 각종 문예지와 소설책, 시집을 정리하다 한켠에 한무더기의 사회과학 서적과 잡지(‘말’과 ‘한겨레21’로 기억한다), 조악한 활자로 ‘민중’과 ‘통일’이 적힌 유인물들을 발견했다. 80년대와 90년대 초반까지 발행된 것들로 지금 보면 ‘소장 가치’가 충분한 잡지들이었지만 새내기를 막 지난 우리 눈에는 먼지가 쌓여 자리만 차지하는 폐지로 보였다. 버렸다.

그 후 첫 문학 세미나에 참석한 (당시 386세대로 통칭된)80년대 학번 선배는 ‘폐지’가 없어진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냈다. 알고 보니 80년대 뜨거웠던 시절, 우리 동아리는 순수 문학동아리의 기치 아래 사실 ‘민중’과 ‘통일’을 몰래 토론하던 ‘언더서클’이었고, ‘폐지’와 잡지들은 그것들의 유물이었다.

세미나 후 술자리에서 또 다른 86선배는 ‘그렇게 한 시대가 저무는 것’이라며 화를 내던 선배를 위로했다. 신청곡을 받던 술집에 정태춘·박은옥의 <92년 장마, 종로에서>가 울려 퍼졌다. ‘모두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지나는 사람들/탑골공원 담장 기와도 흠씬 젖고/고가 차도에 매달린 신호등 위에 비둘기 한 마리/ 건너 빌딩의 웬디스 햄버거 간판을 읽고 있지’ 감상에 젖고 있는 선배들에게 03학번 새내기가 물었다. ‘종로에 웬디스가 있었어요? 지금은 버거킹이 있는데’

학생운동이 본격 쇠퇴한 시기에 대하여 논란은 있으나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하고 대한민국에 민주정권이 들어온 이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1996년 연세대 한총련 사태가 학생운동의 사실상 마지막이었다. 이천년대 학번인 우리에게 그것은 먼 옛날의 신화였다. 우리는 86학번, 90년대 초중반 학번 선배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예컨대 우리는 방학때 가던 ‘농활’의 의미가 ‘농촌봉사활동’으로 알고 있었다(사실은 농민학생연대활동). 우리에게 통일, 민족, 민중, 연대, 해방의 단어는 생경했다. 우리에게 대통령은 노무현이었고, 삶에 대한 에티튜드는 ‘웰빙’이었으며, 여행은 유럽여행이었고, 구호는 ‘호헌철폐, 독재타도’가 아닌 ‘광우병 걸린 소를 먹기 싫다’였다. 우리는 ‘꽃병’ 대신 ‘촛불’을 들었다.

시대는 흘러 86세대는 60대로,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생은 ‘X세대’, 우리 세대는 ‘Y세대’, 그리고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생들은 ‘Z세대’, 혹은 ‘MZ세대’가 되었다. 정치적 견해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가치관, 성공에 대한 기준도 세대별로 판이하다. 당연히 갈등도 있다. 일례로 국내 최대 규모인 현대자동차 노조의 정년 연장 요구를 놓고 베이비부머 세대와 MZ세대간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고 한다. 현대차 노조는 현재 만 60세까지인 정년을 만 65세까지로 연장하자고 주장하나, MZ세대는 가뜩이나 좁은 취업문이 더 좁아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MZ세대는 86세대에 대한 환멸 때문에 비교적 보수주의 성향이 강하다고 한다. 젊을수록 진보적이라는 통설과 다른 현상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견해는 어떤가. MZ세대의 남성들은 86세대의 남성들이 가부장제의 혜택은 다 누리고서 자신들에게만 평등주의적 이념을 강요한다고 항변한다. 저출산으로 인한 국민연금 부담을 오롯이 자신들이 져야 한다는 피해의식도 만연하다. 최근 코로나 19의 재확산 조짐을 젊은 세대의 방탕함으로 돌리는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도 크다. 기득권을 가진 기성세대의 이해와 양보가 필요하다. 그러니 ‘유물’을 버렸다고 화내지 말자. ‘웬디스’가 ‘버거킹’으로 바뀌듯, 시간은 새로운 세대의 몫이니.

나영주 <법률사무소 신세계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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