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많은 나무가 아름다운 무늬를 남긴다
상처 많은 나무가 아름다운 무늬를 남긴다
  • 이소애 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21.06.15 14: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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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나무도 상처가 있어야 향기가 짙다. 어린 시절 우리 집 안방엔 큰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전주장(全州欌)이 있었다. 마치 오래된 느티나무가 우리 가족을 지켜주는 듯 든든했다. 원목의 나뭇결무늬가 살아있어 세월이 지날수록 멋스러움을 느꼈다. 어머니는 느티나무 반닫이 2층장을 닦는 일에서부터 하루가 시작된다.

꼼꼼하게 윤기가 나도록 닦으시면서 나뭇결과 옹이, 옹이 갈라짐과 눌림 자국은 자연적으로 발생 된 나무가 살아온 삶이라고 했다. 나무의 무늬와 질감이 그대로 있어 이층장이 더 고풍스러웠다.

마음에 갈등이 있어 벌떡 누워 있으면 혼란스러운 천장 무늬에 정신을 빼앗긴다. 그러나 반닫이 2층장 무늬를 보고 있으면 울울창창한 숲속에서 잎새들이 부딪는 바람과 새소리가 들렸다.

나무의 상처는 죽어서도 아름답고 찬란한 무늬를 남기는 생이 부러웠다. 전주장이 품고 있는 옹이 무늬에서 나도 나무처럼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했다.

나의 늙음은 내가 제일 늦게 알아본다. 삶이 절망적일 때, 삶이 짐보따리처럼 무거울 때 비참해지지 않기 위해 벌떡 일어나야 한다. 나는 그대로인데 몸뚱이는 점점 비뚤어진다. 황폐해진 마음을 잡으려는 희망을 굴비처럼 엮어서 생각 밖으로 뛰쳐나와야 한다.

올해로 71주년을 맞는 6·25 한국전쟁은 한국인의 삶과 문화에 옹이처럼 깊은 각인을 남겼다. 나이테처럼 새겨진 전쟁의 상처를 딛고 전쟁을 체험했던 국민은 얼마나 배고픔과 가족을 잃은 그리움으로 살았던가. 초등학교 시절 비행기 폭격 소리와 총소리를 피해 동굴에서 숨어 살았던 고통이 6월이면 꽁보리 주먹밥 냄새가 난다. 코로나19에서 참고 견디는 불편함이 어찌 그 시절 전쟁과 같으랴.

히말라야 고산족들은 양을 사고팔 때 양의 성질에 따라 값을 매긴다. 양을 팔 사람과 살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가파른 산비탈 중간지대까지 양을 몰고 올라가 풀어놓는다. 양이 풀을 뜯어 먹는 모습을 지켜본 뒤 값을 흥정한다고 한다. 산비탈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풀 뜯어 먹으면 키가 작고 깡말랐어도 비싸다. 왜냐면, 산비탈 위로 올라가는 양은 지금 당장은 힘들고 어렵더라도 풀을 뜯어 먹을 수 있는 넓은 산허리라는 미래가 보장돼 있다고 판단한다. 이는 삶의 악조건을 받아들이는 양이기 때문이다.

내가 현재 사는 방식이 악조건의 환경에 살고 있어도 이는 내일의 호조건을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점점 쇠약해져도 무망감(無望感)으로 살면 안 된다. 무망감은 더 이상 삶이 나아질 거란 보장도 없고,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겠고, 나는 무가치한 존재이며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증오하고 아주 혐오한다. 나의 삶이 어둠에 있을 때 빛과 희망을 주는 삶으로 전환하는 일에 신속하게 대처해야 한다.

무기력, 무가치, 무망감은 우울증을 가져온다. 혼자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회적 관계 안에서 내가 의미 있는 존재감을 터득하려고 노력하면 어떨까. 무언가를 ‘왜’라는 ‘이유’ 없이 해야 하는 강박에 빠지면 위험하다.

무언가를 추구하지 않는 삶. 아니, 끌려다니지 않는 삶, 무엇인가 목표로 삼고 추구하다 보면 ‘왜’라는 이유를 잊어버리기 쉽다.

요즈음 자살자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고 나면 나도 그럴 수 있다는 두려움에 빠진다. 혹여 나무의 상처처럼 치유되지 않는다 해도 오래된 상처를 잊고 살다 보면 아름다운 무늬로 재생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품어본다.

미국 시인 랄프 왈도 에머슨의 시가 정신적인 위로를 준다. 상처를 아름다운 무늬로 전환 시킬 것 같아 옮긴다.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현명한 이에게 존경받고/아이들에게서 사랑받는 것/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친구의 배반을 참아 내는 것/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아는 것/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성공이 무엇인가> 부분

이소애<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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