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독립운동가 - 권오설, 이선호, 박래원, 이동환 선생
6월의 독립운동가 - 권오설, 이선호, 박래원, 이동환 선생
  • 전북동부보훈지청
  • 승인 2021.06.07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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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통합을 이룬 6·10만세운동 주도

권오설, 이선호, 박래원, 이동환 선생은 6·10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참여한 주요 인물들이다.

6·10만세운동의 주도층은 종교계, 사회주의, 민족주의, 학생, 청년 등의 세력을 망라한 명실공히 민족협동전선체를 지향했다. 6·10만세운동은 3·1운동의 역사적 기반 위에서 거행한 ‘제2의 만세운동’ 이었으나 운동의 추진 배경이나 주체, 이념, 성격 등에서 새로운 양상을 띠었다.

3·1운동이 1차 대전 후 인도주의가 부상하면서 세계 개조의 분위기가 무르익던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6·10만세운동은 제국주의적 지배질서가 공고해지며 국제적으로 고립된 처지에서 계획된 것이었다. 그만큼 6·10만세운동을 둘러싼 국제 환경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었다.

운동의 주체들도 3·1운동 때와는 세대를 달리했다. 3·1운동에서 전위를 담당했던 학생계층이 사회적으로 성장하면서 중심 주체로 나선 것이다. 그에 따라 운동의 이념도 다원해졌다. 3ㆍ1운동의 지도 이념이 자유주의 사상이라면, 6ㆍ10만세운동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이 민족독립으로 모아지면서 이념적 연대를 이룰 수 있었다. 3·1운동에서 종교이념을 초월했다면, 6·10만세운동에서는 정치이념까지 초월하는 민족통합을 추구한 것이다. 6·10만세운동은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발전적 지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6.10만세운동에서 권오설 선생은 책임자의 역할을 맡았고 운동의 추진 과정이나 모든 계획을 주도적으로 추진했다. 권오설은 공산청년회 인사들을 중심으로 계획을 추진하는 가운데, 안동 출신의 이선호, 유면희, 권태성, 권오상 등은 조선학생과학연구회에서, 연희전문학교와 중앙고보 등에서 만세시위를 추진해 갔다. 그는 1928년 5년형을 확정받아 수감생활을 하는 도중 1930년 4월 1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중 순국하였다.

이선호 선생은 이병립과 함께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중심한 6·10만세운동의 계획 주체로 활약했다. 주로 학생 포섭의 역할을 맡으며 세칭 ‘통동계’와 연락을 취했다. 그는 1927년 출판법 위반등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박래원 선생은 권오설로부터 6·10만세운동에 대한 임무 부여를 받았으며 천도교와 협력을 담당했다. 천도교 측의 주요 임무는 격문 인쇄 및 배포와 지방 조직의 활용을 통한 지방 만세운동의 확산에 있었다. 그는 1928년 징역 3년형을 확정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동환 선생은 자발적으로 6.10만세운동을 준비한 속칭 ‘통동계’의 주요 인물로 적극적인 투쟁을 주장했고,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이선호와 중앙고보 동급생인 박용규 등과 양측에서 연락을 담당하면서 연대 투쟁을 추진했다. 그는 1927년 경성지방복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같은 해 9월 20일 만기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공훈을 기려 2005년 권오설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1991년 이선호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2005년 박래원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그리고 1990년 이동환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전북동부보훈지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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