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문화
족보 문화
  • 김동수 시인/(사)전라정신연구원장
  • 승인 2021.04.22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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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이다. 이웃에 진돗개를 키우는 분이 있었다. 아침 산책 길이면 으레 그 개를 앞세우고 다녔다. 두 귀가 쫑긋하고 머리가 육각형이며 벌어진 가슴과 이중으로 말려있는 꼬리 등이 한눈에 보아도 금방 진돗개임을 알 수가 있었다.

마침 그 개가 새끼를 낳았다. 그 소식을 들은 아이들의 성화에 그중에서 한 마리를 골라 사 왔다. 그런데 며칠 후 주인이 찾아와서 노란 봉투를 하나 주었다. “이 속에는 진돗개의 혈통서, 즉 개의 족보(族譜)가 들어 있으니 잘 보관하라”는 당부였다. 그러면서 족보가 없는 개는 값도 없을뿐더러 행세를 할 수도 없다는 말도 남기고 갔다.

그래서인지 그날부터 이 개에 쏟는 가족들의 정성이 달랐다. 개에게 고가의 예방주사를 맞히는가 하면, 잠도 아이들의 방 윗목이나 거실에서 재우는 등 야단법석들이다. 뿐만 아니라 막내 아이는 틈만 나면, 제 또래들을 데리고 와서 개를 자랑하곤 하였다. 누군가가 혹시 잡종이 아니냐고 의심스런 표정을 지을라치면 어김없이 예의 그 족보를 내보이곤 하였다.

개에게도 족보의 의미가 이러하거늘, 하물며 사람들에게 있어서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그런데 묘하게도 집에서 키우고 있는 개의 족보에 대해서는 그 조상의 내력과 수상 경력들까지도 소상하게 줄줄 꿰고 있으면서도 막상 자기 집안의 내력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아직도 자기의 조상이 어디서 어떻게 살다 지금의 이곳으로 와 살게 되었는지, 그 내력을 모른 채, 혹은 알려고도 하지 않는 채, 그냥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떠돌며 사는 이들이 있다.

물론 나름대로 사정이 있으리라고 본다. 그런데도 굳이 여기에서 족보를 들추어 이야기하고자 함은 우리네 한민족을 한민족답게 지키고 가꾸어 온 문화유산의 하나인 이 족보문화가 최근에 와서 차츰 퇴색해 가고 있어 하는 말이다.

족보의 유래는 어느 나라이고 간에 처음에는 왕실이나 귀족들의 혈통을 지키고 통치권을 강화하려는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고려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다 조선 초부터 왕실이 문벌정치의 국가 형태를 취하면서 성행했는데 임진왜란 때 많은 족보가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그러다 숙종 이후 많은 족보가 쏟아져 나왔고 이때 족보가 없는 사람들은 상민으로 전락하여 군역(軍役)을 치르는 등 신분상의 차별대우를 받게 되었다. 때문에 서로 양반이 되려고 관직을 사거나 뇌물을 써 가면서까지 양반의 족보에 끼려는 등 갖은 방법을 다 썼으니 족보야말로 이 시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정치적, 사회적, 신분계급 이상의 상징적 의미가 있다.

족보는 집안의 얼굴로서 문중 간에 일체감을 이루게 하고, 구성원들 간에 소속감과 안정감을 갖게 해 준다. 그리하여 문중의 집단의지와 자신 삶의 목표를 일치시켜 줄 뿐만 아니라, 족인(族人)으로서의 자각을 환기시켜 주기도 한다. 그러기에 족보는 그 집안의 역사요, 전통이요, 정체성이기도 하다.

용비어천가에서 ‘뿌리가 깊어야 나무의 꽃과 열매가 충실하고’,‘근원이 깊어야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내를 이루어 먼바다로 흐를 수 있다’ 하였으니 우리가 이 시점에서 나의 뿌리와 근원을 알고자 함은 한낱 변통성 없는 묵수주의나 복고주의만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옛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알고자 하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이다. 그리하여 흐트러진 오늘의 나를 바르게 가다듬고자 함이오, 과거와 현재를 이어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자기설정의 길이기도 하다. 자기의 과거와 역사를 모르고서야 어떻게 나아가야 할 미래의 방향을 알 수 있겠는가?

엘릭스 할리의 소설 『뿌리』에서 한 흑인의 후예가 조상의 뿌리를 찾고자 온 세상을 누비고 다니듯, 아니 외국으로 입양된 아이들이 성년이 되어 고국으로 자기의 핏줄을 찾아오듯, 자신의 족보에 관심을 가짐은 문명인으로서의 당위가 아닐까? 족보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 정체성이 없는 사람과 같다. 글로벌한 세상에 자기 얼굴을 찾아 자신과 사회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줏대 있는 오늘의 한국인들이 되었으면 한다.

김동수<시인/(사)전라정신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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