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잠, 쉼
밥, 잠, 쉼
  • 이윤애 전북여성교육문화센터 센터장
  • 승인 2021.04.04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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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애 전북여성교육문화센터 센터장
이윤애 전북여성교육문화센터장

가끔 승용차운전석의 여성이 신호대기하면서 화장을 하는 모습은 한 번쯤 목격했을 장면이다. 10분 먼저 일어났어야지 혀를 차는 이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는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시간을 활용하는 재주에 감탄하기도 한다.

식탁에 아침밥 차려놓고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며 식구들을 깨우고 밥을 먹인다. 정작 본인은 한 숟갈도 뜨지 못하고 허둥지둥 출근길에 나서는 일하는 여성들의 모습도 종종 봤음직한 장면이다. 일터의 퇴근시간 여성들은 다시 가사노동 수행을 위해 가정으로 출근해야 된다. 여성들의 가사노동 굴레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작년 통계청이 발표한 ‘생활시간조사’ 결과에 의하면 여성은 하루 평균 3시간 13분 가사노동을 했지만, 남성은 56분에 그친 것으로 조사됐다. 시간 격차가 매년 줄어들고는 있지만 남성의 가사 분담은 미흡했고 여성이 남성보다 3배 이상 많은 시간을 투입할 정도로 편중된 건 여전했다. 이는 성역할에서 가사노동은 여성의 몫이라는 고정관념이 아직도 광범위하게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여성민우회에서는 지난해 ‘밥, 잠, 쉼?여성들의 잃어버린 일상을 찾아서’라는 카드뉴스 형식의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 보고서는 온라인 설문 참여자 130명과 집담회 참가자 14명의 이야기를 통해 본 일하는 여성들의 일상을 구성했다. 다양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이 코로나19 대유행 상황에서 일상의 큰 부분인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기 위한 조건을 탐색하는 결과물이었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여성들은 안타깝게도 팬데믹 이후에 먹고, 자고, 쉬는 것에 공통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토로했다. 가장 큰 이유는 불평등한 가사노동분담인 것으로 드러났다.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 원격교육과 재택근무가 확대되면서 아이를 돌보고 식사를 준비하고 집을 치우는 등의 노동은 여성들에게 더욱 늘어났다.

설문결과를 보면 한 끼 먹는데 소요되는 시간의 질문에서 70% 이상이 30분 이내라고 했고 거의 10% 정도는 10분 미만이라고 응답해 여성들에게는 후다닥 먹기도 바쁜 밥시간이었다. 하루 수면시간은 62.5%가 5~7시간이라 응답했고 1~10점 중 몇 점이냐는 수면의 질에 대한 질문에서는 5점 이하가 36%, 6~7점이 38%를 차지해 수면시간에 비해 수면의 질은 훨씬 낮게 나타났다. 가사 및 가족 돌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 시간상으로 쉼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응답했다.

인간에게 밥, 잠, 쉼은 최소한의 생존조건이다. 그러나 여성들에게 ‘밥은 노동이고 쉼은 없고 잠을 줄여서 자투리로 쉼을 한다’는 것이 이번 프로젝트의 결론이었다. 가정은 개인을 보호해주는 울타리이고 안식처라고들 말하지만 평등한 가사노동과 돌봄의 분담이 실현되지 않는 한 여성들에게는 극기훈련의 장이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발간한 ‘2021년 성격차보고서’에 의하면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성평등세상이 만들어지기까지 36년이 더 늦춰질 거라고 했다. 보고서는 전 세계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격차를 극복하고 성평등이 이루어지기까지 135.6년이 더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2020년에는 99.5년이었는데 코로나19로 36년이 더 늘어난 것이다.

한국의 순위는 156개 국가 중 102위였다. 이 땅의 여성들은 앞으로도 135년 동안 아침출근길 신호대기 중에 한쪽 눈썹을 그리고 다음 신호에서 한 쪽도 마저 그려내는 신공을 발휘해야 한다는 말인가?

아찔하다.

 

이윤애 <전북여성교육문화센터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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