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아픔이 우리 모두의 아픔이 될 때
너와 나의 아픔이 우리 모두의 아픔이 될 때
  • 서정환 수필가
  • 승인 2020.11.24 18: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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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스크 시대가 끝이 보이지 않고 있다. 아니 더 선명하게 다가오고 있다. 이제 마스크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나를 지켜내는 방패막이가 되었고, 사람들은 당연한 일인 듯 마스크를 쓴 채 거리를 오간다. 저마다 천 조각으로 얼굴을 감싼 기이한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류에게 축복의 시대는 가고 재앙의 시대가 다가온 것이 아닌가 싶어진다. 전대미문의 희소한 질병이 창궐하고, 홍수와 태풍을 비롯한 재해가 하루가 멀다 하게 밀려오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아랑곳없이 오직 앞만 보며 질주를 하고 있다.

 외치고 절규해도 인간의 욕심이 바뀌지 않는 한, 이 세상도 삶도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어두운 세상에서 마스크를 쓴 채 질식할 것 같은 고통의 나날을 보내며 바위에 쇠사슬로 묶여 날마다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는 프로메테우스처럼 ‘깨닫지 못’하고 이 세상과 삶을 살아가는데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지 못한다. 떨리는 가슴으로 아픔과 슬픔을 안을 수 없다면 인생이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기억을 기억으로 간직하지 못하고 고통을 고통으로 공부하지 못하는 인간, 그러면서 ‘존재자 없는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운명은 너무나 슬프다.

 그나마 주변에서 온전히 제 모습을 간직하는 것은 자연뿐이지 싶다. 꽃과 새와 별들은 여전히 제자리에서 어두운 인간과 세상을 밝히려 애쓰고 있다. 산책길에서 만난 나무들과 대화를 나누며 저들의 삶의 깊이와 아픔을 함께 나눈다. 나무들에도 지난 세월의 풍파 속에서 얻어진 질곡과 인내가 가혹하리만큼 켜켜이 쌓여 있다. 봄의 연두에서 여름의 초록까지 깊은 인고의 아픔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기에는 세월의 더께가 너무 무겁다. 나무의 찬란함은 기나긴 서사의 결과물이다. 찬란한 초록은 살아서도 나무이며 죽어서도 나무이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임을 보여준다. 나도 이제 부질없는 세속과 결별하고 몸과 영혼이 저 초록빛 나무처럼 변신해 보기를 소망해 본다. 나무의 초록빛 깊이를 공감하며 그의 곁에 서기에는 마스크를 쓴 내 몰골이 너무 누추하고 비루하다. 경건하고 엄숙한 나무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꾸 마음이 흔들린다. 인간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다짐해 왔지만, 한 그루 나무 앞에서조차 내가 저들보다 나은 것은 무엇일까, 내가 저들만큼 세상을 사랑한 것일까, 라는 자괴감에 빠져든다. 나무보다 헐벗고 보잘것없는 나의 삶!

 나무와 나 사이의 관계 맺음이라는 사소하지만 중대한 문제 앞의 무력함. 그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데 인간과 세상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할 것인가. 내가 나무와 함께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가지뿐이다. 나무와 함께 아픔과 슬픔의 서사를 토로하는 것, 삶의 고통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뿐이다. 고통의 서사가 언어의 수사를 넘어 구체적인 삶의 문제로 다가가지는 못한다. 나무를 위한 나의 서사는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이 세상에 내 고통의 서사를 함께 말할 친구가 얼마나 되는지, 내 서사의 고통을 읽어줄 독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언제나 나의 고통은 궤짝 속에 담긴 오래된 물건같이 퇴색한 나의 몫일 뿐, 언어로 나의 고통을 말하기 전에는 고통이 끝나지 않는다. 언제까지 절규의 표정만 짓고 있을 수는 없다. 우리는 ‘절규하는 자’에서 ‘말하는 자’로 바뀌어야 하고 그렇기 위해서 함께 말해야 하고 글쓰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끊임없이 언어를 의심하고 경외하면서 언어에 기대어 이 세상의 길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언어에 대한 의심은 진실에 대한 갈망을 드러내는 것이고, 언어에 대한 경외는 진실에 대한 태만한 마음을 다잡는 것이다. 글을 읽고 쓰는 일을 통해 나의 고통은 물론 이 세상과 누군가의 고통에 다가설 수 있다. 그래야만 나와 타자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하면서 고통에 대한 쓸모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이 세상이 고통스러운 것은 무엇보다 심미적 삶의 가치가 상실되고 있다는 사실에 있는 것 아닌가 한다. 아름다움과 그 가치가 상실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험난한 현대적 삶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심미적 삶의 가치일 것이다.

 질병과 고통으로 인해 내가 침몰하면 주변도 함께 함몰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 나의 고통은 못 견디게 슬퍼하면서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심하다. 타인의 고통은 서사가 지워진 한순간의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다. 이미지 과잉사회에서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을 한순간의 장면으로 소비해 버린다.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고 연대하며 서로 위로하고 부대끼며 극복해가야 할 것이라고 감히 외쳐본다. 너와 나의 고통이 우리 모두의 고통이 되었을 때 어떤 어려움도, 아픔도 극복되지 않을까.

 서정환<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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