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광복 밀알이 된 오수 항일운동의 자취
민족광복 밀알이 된 오수 항일운동의 자취
  • 김추리 시인
  • 승인 2020.10.15 15: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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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되짚는 전북 구국혼2 (12)임실

산골마을 임실 오수는 터가 그런 것인지, 인성이 그런지 이곳 선인들은 일찍이 나라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오수는 골골마다 독립운동가의 발자취가 서려 있고 전설 같이 만세운동의 함성이 서린 곳이다.

임실(설산이광수선생의거기념탑)
설산이광수선생의거기념탑

■ 수삼일독립운동기념탑과 설산 선생 기념비

독립운동가의 숨결을 찾아 길을 나선다.

선열들의 숭고했던 나라사랑이 하도 벅차 한두 번의 걸음으론 못내 송구하였다. 세 번째 오수에 가던 날 아침, 초여름을 마중이라도 하는 듯 보슬비가 보얗게 내렸다. 안개비가 밤 내 땅을 적시고 풀잎, 나뭇잎에 보석을 달았다. 보일 듯 말 듯한 비의 자취가 오롯하다. 독립운동가의 끝없는 항쟁도 저러 했으리. 가랑비에 옷 젖듯이 힘 약한 민중들의 함성도 저러 했으리.

오수 3?1독립만세운동은 민족광복의 밀알이 되었다. 이 운동은 종교인과 교육자, 학생, 민중이 다함께 일치단결한 항일항쟁이었다.

먼저 오수삼일독립운동기념탑이 있는 동산으로 향한다. 발목을 이슬에 채이며 한 걸음 한 걸음 묵묵히 올라 빗물에 촉촉이 젖은 기념탑 아래서 고개를 숙인다. 당신들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 나라의 독립을 이룩했으리요. 공손히, 좀 더 공손히, 마음을 모으고 그날의 태극기 물결과 함성을 그려본다.

오수초등학교로 향했다. 100여 년 전, 나라사랑이 별나던 그 꼬마들의 위상을 지금에라도 느껴보고 싶다. 그 어린 애국자들을 이끌었던 설산 이광수 선생 기념비를 찾아 먼저 목례라도 갖추고 싶어서다.

교문 옆 등나무 꽃이 주저리주저리 피어 향기가 등천한다. 유난히 긴 꽃숭어리가 축축 늘어져 꽃발을 드리웠다. 이 또한 보기 드문 별난 모습이다. 등꽃을 보고도 그날의 함성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 오수다.

임실(오수 원동산)
오수 원동산

■ 그로부터 100년 후, 오늘의 원동산에서

3월 23일 오수 장날에는 이기송을 비롯한 2천여 명의 군중들이 만세운동에 참가했다.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던 원동산. 당시 원동산은 이름 그대로 둥실한 언덕배기였다. 맨손에 태극기를 들고 원동산과 오수 장터 주변을 돌고 또 돌았을 흰옷 입은 우리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한 뜻을 품고, 한 목소리로 외치는 동지들이었기에 두려움도 힘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오수장에 모여드는 사람을 감시하기 위해 세운 망루는 오늘도 시장통 한편에 서있다.

지금의 원동산은 조용하고 사색하기 편안하다. 여유롭게 햇살을 받으며 오수(獒樹)의 그늘에 안겨 오수(午睡)를 즐겨도 좋다. 느릿느릿 거닐며 고려 적부터 전해오는 오래된 설화. 보한집에 ‘지금부터 1천 년 전 거령현’ 때 이야기라 했으니 얼마나 오래된 이야기인가. 슬프지만 따뜻한 이야기에 우리는 긴 세월 감동을 이어오고 있다.

■ 누구라도 자랑스러운 ‘둔데기 이씨’라고 하고 싶었을 거야

‘둔데기 이씨’는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춘성정 이담손’의 후예들을 일컫는다. 이들이 번성하여 사는 곳이 오수면 둔덕리(둔데기)였으며 그 씨족들이 스스로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삶을 살았기에 둔데기 이씨라는 영예의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그만한 가문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부르고 싶을 것이다.

3.1운동 때는 일가 16명이 만세운동을 주도해 일본 헌병과 맞섰다. 그러다가 16명이나 되는 일가가 징역을 살고 목숨을 잃었다. 한 가문이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 독립운동을 한 충의와 절의는 둔덕 이씨를 빼고는 예가 없다.

임실(이웅재고가-사랑채)
이웅재고가-사랑채

  둔데기에는 ‘이웅재고가’라 불리는 500년 된 춘성정의 고택이 있다. 마을에 들어서면 고샅 멀리 웅장하면서도 정겨운 솟을대문집이 보인다. 대문 앞에는 하마석과 상마석이 있다. 대문 위로 삼태극과 삼지창(三枝槍)이 있고 부챗살무늬 서까래가 햇살인 듯 눈부시다. 그 아래 고종황제께서 하사하신 ‘유명조선효자증통정대부이조참의이문주지려(有明朝鮮孝子贈通政大夫史曹參議李父胃之閭)’라고 쓴 효자정려문이 정숙하다.

문턱을 넘어서면 넓지 않은 마당과 크지 않은 사랑채가 반갑다. 대청마루 열린 문으로 바라보이는 뒷마당 풍경이 액자 속 그림이다. 뒤뜰 높이 소박한 춘성정사(春城正祠)에는 춘성정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사랑채 왼쪽 앞으로 엇비껴 앉은 안 행랑채에는 한 칸짜리 조그만 다락이 있다. 체백을 모셨던 곳이라고 한다. 이 집안에선 특히 효가 유별났다고 한다. 문득 효가 인간의 본이라고 여겼던 옛 어른들의 삶이 존경스럽다. 안채도 작다 싶을 만큼 아담한 건 현대의 집들이 너무 크기 때문일까. 방과 뜰방, 조그만 마당이 정겨워 마루에 걸터앉아 마루 결을 손바닥으로 쓸어본다. 마치 할머니 집 마루처럼 보드랍고 편안하다. 어느새 오래 된 이 집과 정이 든 건지 낯설지 않다.

오수 둔덕 이씨 가문의 활약을 가슴에 새기며 옛집을 나오는 걸음이 감동으로 가득하다. 오래도록 앉아있고 싶은 곳이다.

# 삼계강사(三溪講舍)와 삼계계안(三磎?案) 그리고 영춘(迎春)

둔덕리는 백제 시대부터 형성된 오래된 마을이다. 삼계강사는 둔덕고을을 위시하여 근동의 일곱 성씨들이 동네 계(洞契)를 맺고 관혼상제와 후학을 가르치며 상부상조의 덕목으로 대동향약을 맺어온 독특한 마을자치계이다.

삼계강사는 조선조(1613년)때 설립된 지방 향학교육기관이다. 강사의 계안(135책과 고문서92장)을 보관하고 있다가 1998년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60호로 지정받아 현재 전북대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 그때 발의하고 기록한 삼계계안은 지금에 와서 소중한 자료가 되었다. 400여 년 전, 뜨겁게 활약하던 삼계강사가 그때의 훈김 대신 건물만 썰렁하다.

항일의병과 3?1독립운동가들의 자취를 찾는다고 오수를 들랑거리다보니 처처에서 편액이나 암각서를 만났다. 이런 것들 또한 후세에게 전하기 위한 깊은 마음이다.

전별과 마중을 했다는 정겨운 체리암(滯離巖), 바람으로 목욕을 한다는 한량 같은 풍욕정(風浴亭), 덕가암(德加岩)과 영춘대(永春臺)를 보물찾기 하듯 찾았다. 구로정(九老亭)과 단구대(丹丘臺)는 더욱 힘들게 찾았다.

이른 더위로 땀을 뻘뻘 흘리며 獒樹川과 栗川, 鰲川이 합하여 섬진강으로 가는 하천을 따라 걸으며 선대의 그분들을 생각한다. 나도 뿌리 깊은 바위 하나 붙들고 ‘나라를 찾아주신 임들이시여! 고이 머무소서.’라고 또닥또닥 새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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