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그날 ‘94년’
오래전 그날 ‘94년’
  • 김근혜 동화작가
  • 승인 2020.07.21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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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곡의 노래는 엽서 같아서]<19>

 늙수그레한 주인이 운영하는 커피숍의 문을 열었다. 원산지를 알 수 없는 커피 향과 주인의 취향인 것 같은 대중가요가 버무려진 가게는 다소 음침했다. 가장 밝은 자리를 찾아 노트북을 꺼냈다. 글을 쓰기 전에 꼭 하는 손가락 관절 꺾기를 하다 말고 반대편 나무 책장에 시선이 갔다. 빽빽이 꽂힌 LP판. 그리고 투명 플라스틱 뚜껑을 단 낡은 LP 플레이어가 눈에 들어오자 흘려들었던 노래가 또렷이 들리기 시작했다.

 

 “교복을 벗고 처음으로 만났던 너, 그때가 너도 가끔 생각나니.”

 

 윤종신의 ‘오래전 그날’이라는 노래였다. 94년 1월. 찬바람이 코끝을 에는 겨울, 햄버거 가게의 긴 탁자에 앉은 수많은 이들 틈에서 눈이 마주쳤던 그 애를 떠올리게 하는 노래.

 

 두 번의 수능 시험을 치르고 우리 반은 모 남학교와 단체 반 미팅을 했다. 번호표를 뽑아 같은 번호끼리 커플이 되는 방식인데 상대를 확인하고 둘 중 한 명이라도 거절 의사를 밝히면 커플 실패였다. 우여곡절 끝에 딱 세 커플이 연결됐는데 나도 그중 하나였다. 커플이 된 애가 배우 ‘감우성’을 닮는 바람에 나는 우리 반 여자애들에게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커플이 된 우리는 햄버거 가게를 나왔지만 입을 열지 못하니 마음을 확인할 길 없어 갈 곳도 몰랐다. 다행히 커플이 안 된 아이들이 어색한 우리를 노래방으로 데려갔다. 신나게 노는 아이들 틈에서 뻣뻣하게 앉아 눈빛만 주고받았던 그 날을 시작으로 우리는 주말마다 만났다. 정해진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시내를 돌아다니거나 햄버거 가게 창가에 앉아 콜라를 홀짝거리는 거로도 즐거웠다. 그 애는 항상 휴대용 카세트를 가지고 다녔는데 이어폰 한쪽을 내 귀에 꽂아주며 노래를 들려줬다. 그즈음에 유행했던 노래가 윤종신의 ‘오래전 그날’이었다. 그 노래를 들으며 창에 비친 그 애의 엷은 미소를 보는 게 좋았다. 그러다 그 애의 눈빛이 나를 향할 때면 새침한 나는 짐짓 모른 척했다. 묘한 설렘이 좋았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앳된 20살을 즐겼다.

 그 애는 무척이나 아는 게 많았고 세상을 보는 눈도 날카로웠다. 가끔 허공으로 날카로운 눈빛을 던질 때면 괜스레 불안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지나친 기우가 아니었다. 생긴 것과 다르게 투지가 넘친다 싶더니 김일성 사망 후 주사파 사건으로 대학 1학년이었던 그 애는 퇴학을 당했다. 그 사건은 유별나게 뜨거웠던 여름만큼이나 그 애와 내 삶을 강하게 흔들어 놓았다.

 먼저 연락을 끊은 건 그 애였다. 대학이 다르니 그 애 집으로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어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부재중이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한동안 나는 그 애가 내게 전화를 걸었던 시간에 맞춰 전화기 앞을 지켰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기다림에 지친 나는 조금씩 그 애를 잊어갔다. 잊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날따라 괜히 설레더라니 그렇게 기다려온 그 애에게 몇 달 만에 연락이 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뒤엉킨 감정을 이기지 못한 나는 내가 아는 온갖 욕을 다 쏟아 냈다. 그리고는 꺼이꺼이 울음을 토해냈다. 그 애는 나의 변화무쌍한 감정을 다 담아낼 마음의 준비가 된 사람처럼 무덤덤했다. 내 욕이 바닥을 드러내고 눈물이 말라갈 때쯤 그 애가 입을 열었다.

 “난 괜찮아. 그러니 더 걱정하지 마. 그리고 나 너하고 영화 볼 때 손잡고 싶었는데 용기가 없었다. 다시 그런 기회가 올까?”

 내 대답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뚝뚝 끊어지듯 목이 멘 그 애 목소리에서 그간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그의 아픔이 느껴졌다. 그러기에 다시 만나자는 말이 혀끝에 말려 나오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수 대교가 무너졌다는 뉴스가 나왔다. 성수 대교 붕괴 소식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그 애가 떠올랐다.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맥없이 끊긴 그 애의 청춘이 칼로 자른 듯 뚝 잘려 나간 성수대교와 오버랩 되었던 건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쫓기듯 세상 밖으로 밀려난 그 애를 생각하면 나는 아직도 햄버거 가게에서 같이 들었던 ‘오래전 그날’을 듣던 때로 테이프를 돌리고 싶다. 아무 걱정 없던 94년이 시작되는 그 겨울로 말이다. 그리고 흔한 대중가요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처럼 유연하게 살면 어떻겠냐라는 씨알도 안 먹히는 말이라도 해주고 싶다. 나란히 이어폰을 나눠 끼고 먼지 낀 창밖을 바라보고 싶다.

 

 글 = 김근혜 동화작가

 

◆김근혜

 2012년 신춘문예 동화당선. 최근 첫 장편동화 『제롬랜드의 비밀』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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