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서원에서 거문고를 타는 선비를 만나다
무성서원에서 거문고를 타는 선비를 만나다
  • 임보경
  • 승인 2020.07.20 17: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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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의 초록바람에 거문고 타는 소리가 둥둥~들린다. 아울러 기타소리와 기쁨의 함성이 들판의 곡식들을 쑥쑥 흥겹게 한다. 그런데 책읽는 소리는 무엇일까? 그곳을 찾아 발걸음을 서둘러 본다.

 정읍 칠보면 마을 중앙에 위치한 무성서원은 세계문화유산 마크와 시원하게 세워진 현가루가 한눈에 띄었다. 중국의 노나라시절 공자의 제자인 자유가 무성이라는 마을을 잘 다스리며 백성을 편안하게 하여 거문고 타는 소리에 공자가 탄복했다는 유래에서 무성서원의 이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2층의 현가루에서 마을사람들의 태평성대를 바라보며 거문고 음악소리가 울려퍼짐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 흥겨움에 2019년 7월 6일 무성서원은 한국서원으로 9개 중 한 곳으로 등재되는 기쁨을 안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수서원을 시작으로 수많은 서원이 조선후기를 장악한 것으로 흥선대원군때는 국가의 재정과 사림들의 탐욕을 억제하기 위한 철폐령이 내려져 600여개의 서원 중 47개만이 명맥을 이어온 것으로 보는데 그 와중에도 정읍 칠보의 무성서원이 세계무화유산으로 자랑할 수 있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던 것으로 본다.

 서원이란 인성과 지성교육을 통한 올바른 선비를 양성하는 지방의 사립교육기관이다. 이곳에 모이는 학생들은 그 지역을 대표하는 스승에게 올바른 교육으로 선비의 정신을 잘 고안하며 인·의·지·예·신의 덕목을 몸에 익혔다. 또한 이들은 가르침을 주시는 선현에 대한 제사를 모시며 스승과 제자가 다시 만나는 공간에서 인문학공간의 제향의식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들에겐 특별한 공부시간이 주어진다. 그것은 향음주례이다. 향음주례란 지방에서 술마시는 예법을 통해 장유유서를 구분하며 예의바른 젊은이로 성장하게끔 1년에 1~2회의 예법 속에서 어른에 대한 공경을 배우는 것이다. 얼굴이 붉어지는 것 또한 학문하는 이에게는 옳지못함이요. 그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탐욕을 부리는 관리로 변하는 마음도 자제할 수 있는 이성을 갖게 하는 교육이다. 이렇듯 서원은 스승에 대한 공경은 주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으로 영향력이 되며 요즘 젊은이들에게 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국가로부터 사액을 받은 서원이기도 하다. 그곳은 일반서원처럼 산수가 수려한 곳으로 배산임수의 자리에 있어서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무한한 힐링의 공간이기도 하며 학문에 집중할 수 있는 최상의 장소이다. 그런데 무성서원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마을의 민가를 울타리 삼아 중앙에 있는 것으로 일반서원의 입지조건과는 사뭇 다르다. 이 다름의 무성서원은 예전의 모습을 보존하여 외적인 부분보다 내적인 부분에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보여진다. 현가루를 지나니 강당인 명륜당이 보인다. 3칸의 마루로 이루어진 강학당은 앞뒤가 뻥뚫린 구조이며 그 공간 속에 뒤편의 태극문양의 내삼문이 나지막하게 고개를 숙이게 한다. 태산사라 쓰여진 현판 앞에 불그스레한 관복을 입은 태수현감이었던 신라말기의 고운 최치원 선생의 영정이 반기는 것이다. 선현을 모시는 사당이지만 살아서 사당을 만들어 모셨다는 점은 우리 역사상 유례가 드문 예이다. 태수현감시절 백성에게 베풀어준 선정에 함양군수로 떠나신 뒤 그를 그리워하며 생사당을 지어 모신 경우이다. 그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볼 수 없지만 생사당 자체만으로도 그분의 선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탐관오리의 탐욕의 지역인 전라도는 최치원 선생의 애민정신은 오래도록 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불우헌 정극인선생의 향약정신과 백성의 교화 열정에 태인현감으로 부임해 온 신잠의 학문 터전 마련에 보태어지면서 7분의 위패를 모신 태산사가 꽉 차 보였다.

 학교에 가면 학칙이 있듯 무성서원에도 원규(규칙)가 있었다. 첫째 입학자격은 신분과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가능했다. 학문에 뜻을 두는 자는 귀천과 나이를 따지지 않는다는 점은 전국의 많은 학도들에게 인기 비결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입문은 개방적이나 교과에는 엄격함이 있었다. 성리학 관련 도서외에는 반입이 불가능하며 단 역사서적만은 인정되었다. 참 국가의 기본을 아는 교육기관이라 맘에 들었다.또한 철저하게 과거를 준비하는 입신양명을 꿈꾸는 이에게는 입학이 허락지 않았다. 오직 본연의 학문만을 하고자 하는 이게게는 무한한 환영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전국의 유생들이 쉼없이 무성서원을 찾게 되니 지방의 독서열풍이 자연스레 출판사업을 번창하게 하였던 것을 태인방각본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유생들의 기숙사는 서원의 강학당을 기준으로 동재와 서재로 좌우에 배치되는 게 일반적이나 이곳은 기숙사와 제를 준비하는 관리실 등이 담장을 두고 다른 공간에 있음도 색다르게 보였다.

 곡창지대 1위의 고장 전라도의 태인에 위치한 무성서원은 관찰사가 원장이고 부원장이 태인군수였다는 것은 그만큼 무성서원의 위상이 높았음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을사늑약의 불합리함에 맞선 유림의 항일의병 운동지로 ‘병오창의기적비’가 대변하고 있었다. 비움의 담백함을 알라는 선비의 정신에서 화려하지도 크지도 않지만 출세가 아닌 지역민과 함께하는 무성서원의 보편적 가치와 이념을 존중하며 지켜야함을 현가루에서 당부해 본다.

 임보경<역사문화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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