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을 위한 행진곡」에 관한 추억
「임을 위한 행진곡」에 관한 추억
  • 김완준 시인
  • 승인 2020.07.07 16: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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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곡의 노래는 엽서 같아서]<17>

 2000년 가을부터 2001년 봄까지 8개월 동안 동남아를 여행했다. 2000년 12월 31일 밤에는 싱가폴의 클라크 키에서 다양한 국적의 여행자들과 어울려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했다. 다음날, 말레이시아 국경을 넘어서 조호바루-말라카-쿠알라룸푸르-카메론하이랜드를 거쳐 페낭에 도착했다.

 페낭은 중국인 이민자들에 의해 생겨난 디아스포라 문화, 페라나칸의 발상지로 유명한 섬이다. 나는 페낭에서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을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내가 만나기로 한 Mr. Chee는 중국계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어를 한 마디도 못했다. 대신 영어는 능통했다.

 말레시아는 말레이계, 중국계, 인도계, 이 세 민족이 어울려 사는 국가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공공표지판은 영어, 말레이어, 한자, 힌두어 등 4개 언어로 표시되어 있다. 각 민족 출신은 영어와 자신의 민족 언어에 능통하다. 즉, 중국계라면 중국어와 영어는 물론이고 말레이어까지 능통한 사람이 많다. 그런데 미스터 치는 중국계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어를 전혀 못했다. 어릴 때부터 영국 유학 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이었다.

 미스터 치는 대단히 지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NGO 활동가였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순전히 나의 초라한 영어 실력 때문이었다.

 미스터 치는 한국도 여러 차례 방문했으며 태국, 대만, 영국, 미국 등 해외 출장이 잦다고 했다. 우리가 만났을 때도 유럽 출장에서 갓 돌아온 때였다. 불과 며칠 전에 불쑥 연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았던 셈이다.

 “아는 한국 노래가 하나 있다.”

 페낭의 아름다운 해변 바투 페링기에 있는 미스터 치의 집에서 그의 아내가 차려준 상어 커리 요리를 맛있게 먹은 다음 디저트를 즐기던 중 그가 불쑥 말했다. 내가 무슨 노래인지 맞추어 볼 테니 불러보라고 하자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몇 소절 듣다보니 무슨 노래인지 알 것 같았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어떻게 이 노래를 아느냐?”고 물었다. 미스터 치는 세계 각국의 NGO 활동가들이 모이면 이 노래를 꼭 부른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이 노래가 대한민국의 국민가요냐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임을 위한 행진곡」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을 설명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대한민국의 국민가요가 아니라 민중가요다.(국민가요와 민중가요의 차이를 그가 이해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왜냐면 내 영어가 어설펐으므로.) 1980년 5월, 대한민국 전라도 광주에서 일어난 비극적 사건으로 스러져간 한 쌍의 남녀를 추모하는 영혼결혼식이 있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그 영혼결혼식을 위해 만들어진 노래다. 민중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백기완의 시를 토대로 방북 소설가 황석영이 노랫말을 다듬었으며 대학가요제 출신 김종률이 곡을 지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에 얽힌 사연을 서툰 영어로 더듬더듬 설명하는 내 말을 진지한 표정으로 경청하고 있던 미스터 치가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그동안 이 노래가 한국 노래인줄만 알았지 어떤 의미가 담긴 노래인지는 몰랐다. 광주, 영혼결혼식, 민중후보, 방북 소설가…… 이런 내용이 무척 흥미롭다. 앞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이 노래의 사연을 알리겠다.”

 뉴 밀레니엄을 맞이한 지 얼마 되지 않던 날, 말레이시아 바닷가의 아파트에서 난생 처음 만난 외국인과 「임을 위한 행진곡」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낯설고도 신기했던 장면이 문득 떠오른다. 케이 팝이 유명해지기 전에 이미 「임을 위한 행진곡」이 국제적으로 한류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남북통일이 되면, 그리고 북녘의 동포들이 반대하지 않는다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애국가로 하면 어떨까? 여러 나라의 깨어 있는 시민들이 즐겨 부르는 이 힘찬 노래를!

 

 글 = 김완준 시인

 

 ◆김완준

 198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장편소설 『the 풀문 파티』, 현재 모악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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