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문화공존도시를 찾다
역사와 문화공존도시를 찾다
  • 시인 신남춘
  • 승인 2020.07.02 16: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한일 독립 100주년 글로 되짚는 전북 구국혼2 (3)익산
구국충정의 고장 익산에서 애국정신의 꿈을 키우자

날씨가 화창하였다. 자연과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익산시 왕궁리 유적지를 찾았다 키 큰 벚나무 숲이 방문객과 눈을 맞춘다. 이곳은 미륵사지와 함께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이다 백제말기 궁성이었던 건물이 헐리고 그 자리에 사찰이 조성됐다. 왕궁에서 사찰로 변한 까닭은 무왕이 승하 하고 익산 쌍릉에 모셔지면서 무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유적전시관은 2008년 개관됐다. 평일 오전시간 조용하고 여유롭게 관람할 수 있어 좋았다. 전시장 밖으로 나와 발굴현장의 광활한 터를 걸으니 당시의 역사 속으로 시간여행 온 기분이다. 오층석탑의 수수하면서 견고한 조형미에 감탄하고 수많은 선열들의 발자취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의병장 오하 이규홍기념비

익산시내로 들어가는 길 왼편으로 의병장 오하 이규홍기념비가 서 있다 기념비 뒤로 신록의 푸른 기운이 가득하다. 이규홍은 1907년 의병장이 되어 257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고산 가금리에서 적과 접전 29명을, 진안 장수 용담 등지에서 44명을 사살 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적의 강한 소탕전으로 전력이 쇠퇴 1908년 의진을 해산하고 중국으로 망명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국내로 들어와 활동 중 1927년 2월 서울에서 체포되어 잔혹한 고문을 당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고문후유증으로 이듬해 순국하셨다. 선생의 공훈을 떠 올리듯 민들레홀씨가 하늘을 날고 있다.

우당 홍순갑선생 추모비

■의사 우당 홍순갑선생 추모비 

의사 우당 홍순갑선생 추모비가 있는 금마면 주민자치센터를 찾아 갔다. 선생은 1917년 일본으로 건너가 조도전대학재학중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했으며 동년10월 일경에 체포되고 1921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려국민당 중앙검사부 집행위원으로 동지규합 및 무장 항일운동을 하다 1929년 하얼빈에서 일경에 체포되고 평양 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형이 확정되어 신의주 형무소 복역 중 혹독한 고문의 여독으로 그해 옥사 순국하였다. 순국한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금마면 주민들이 추모비를 세웠다.

■여산 독립만세운동 기념비 

여산 독립만세운동 기념비는 여산초등학교 내에 있다. 이정, 박사국, 이병석과 면민 200여 명이 조선자주독립이라고 쓴 깃발을 앞세우고 여산면 헌병분견소 남쪽 400m까지 진출하였으나 일경이 만세운동을 주도한 자를 체포 6개월간 복역하였다. 3의사와 200여명의 애국정신과 독립정신을 후손에게 전하여 슬기롭게 이어가고자 당시 헌병분견소가 있었던 자리에 2003년 5월 주민들이 세운 기념비이다. 모두의 가슴에 애국 혼이 깃들기를 기대하며 자리를 옮겼다.

가람 이병기 선생 동상

■이병기선생 생가

이병기선생 생가를 찾았다 고풍의 한식초가로 안채, 사랑채, 헛간, 고방채, 정자 등이 보였다 수우재(守愚齋)라는 사랑채의 이름은 지조 있는 선비로 사신 선생의 풍취가 은은하게 느껴졌다. 생가 옆으로 수령이 200년쯤 된다는 탱자나무가 있다. 그 오른쪽 아래로 선생의 기념비, 동상, 박사묘가 차례로 있다 생가 왼쪽으로 가람문학관이 2017년 10월 개관하여 선생의 삶과 문학 업적과 유물들까지 살필 수가 있다.

선생은 1927년 2월 권덕규, 최배현, 정열모, 신명균 등과 함께 ‘한글사’ 를 조직 월간잡지 ‘한글’ 을 발간하였다.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인,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 전국순회 조선어강습회 강사, 진단학회 발기인, 조선어표준어 사정위원으로 활동하셨다.

1942년 10월 일제가 한국어 말살정책을 강화하여 한글연구자들을 탄압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다. 광복 후 서울대학교 교수로 국문학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 후 전북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셨다. 문득 2019년 개봉된 영화 조선어학회 사건을 주제로 한 ‘말모이’ 가 떠 오른다. 선생의 애국정신에 머리가 숙여졌다. 

이병기 선생 생가

■사당 매곡사

매곡사 터를 찾아갔다. 매곡사는 1927년 김근배 선생의 제자와 유림이 당시 생가에 매곡사라는 사당을 세웠다.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침탈하자 성균관박사로 있던 그는 그 직을 사임하고 낙향 청장년들에게 항일독립정신을 고취시키며 교육에 전념하였다. 1910년 8월 조선총독부가 헌병주재소장을 통해 그를 포섭하려고 소위 은사금을 보내오자 수령을 끝내 거부하고 앞으로도 수없는 곤욕이 있을 것을 예견 죽음으로서 충절을 지키겠다는 유서를 남긴 채 돌을 안고 우물에 빠져 순절하였다. 택지개발로 생가와 매곡사는 자취를 감추었고 김근배유장비, 매곡사창건비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지 못 한다. 자취를 감춘 매곡사의 슬픈 이야기에 측은한 마음뿐이었다.

■화랑회 이상운 의사 추모탑 

화랑회 이상운 의사 추모탑은 전북대학교 익산캠퍼스에 있다. 의사는 1943년 이리농림학교 2학년 때 화랑회를 조직 독립단과 제휴 무장 항일활동을 하였다 화랑회는 일제의 통치에 대한 항거 목적의 행동결사로 총기 폭약 등을 탈취 무장을 갖춘 후 주재소 및 경찰서를 습격하고 목천교를 폭파함으로서 일제의 식량수탈 통로를 차단하는 것 이었다. 1945년 4월 화랑회 조직이 일경에 발각되어 모두 붙잡혔다 선생은 잔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하다 1945년 7월 17일 옥중 순국하셨다 안내판이 따로 없어 찾기가 쉽지 않았다.

■춘포역사

춘포역사(폐역)를 찾아갔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세운 간이역 (1914~2007)이다 일제강점기 때는 대장역으로 불렀다. 비옥한 곡창지대 쌀 수탈을 목적으로 지어진 간이역이다. 근처에 일본인 농장이 설립되었다. 춘포역은 역사적 건축적 철도사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제210호로 지정 되었다.호남의 농업수탈지역 그 아픈 역사의 숨결이 멈춰 있는 곳이다.

익산의 부분적인 현충시설을 보고 느낀 것은 서로의 무관심 속에 외롭고 쓸쓸한 기류가 흐른다는 것이다. 후세의 관심으로 애국 혼이 길이 보존 관리되기를 염원한다. 현존 애국충정의 영령들의 흔적이 누눈가의 손길에 의해서 보존되고 관리되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며 당연한 일이다. 애국충정 영령들의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을 함께 기리고 배우고 이어가는 우리의 아름다운 면모를 보여주자 익산의 빛 애국충정의 꿈 빛을 보고 싶다.
 

# 구국항쟁 정신을 가르쳐온 이석규 애국지사

생존 애국지사 이석규 옹 댁을 방문하였다. 95세의 나이에도 참 건강하시다. 뭐든 잘 드신다 하셨다. 집안의 물건들 깔끔한 정돈 이었다. 차를 마시며 항일운동의 계기가 된 일화를 들었다.

광주사범학교 시절 시내 목욕탕에서 일본인 학생들에게 모욕과 집단 폭행을 당한 적이 있다. 일본인만 다니는 목욕탕인 까닭 이었다. 다음날 일본인 학생에게 경례 할 줄 모른다면서 뺨을 때렸다. 그 일로 1개월간 정학처분을 받았다 분개하던 중 1943년 3월 동급생 17명과 함께 무등 독서회를 결성하였다.

무등 독서회는 전주사범학교 및 임시정부 비밀요원과의 접촉과 정보교환, 태극기 제작, 근로동원 기피, 임시정부 밀령전달, 해외방송 청취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1944년 10월 홍완균이 전주에서 활동 중 일경에 체포 되면서 그 실체가 밝혀지고 회원들은 비밀결사독립운동 죄로 광주경찰서에 수감 옥고를 치렀다.

광복이 된 후 교직에 계시면서 학생들에게 독립운동에 대한 가르침을 잊지 않으셨다. 늦게나마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것이 영예롭고 자녀들에게 자랑스런 아버지로 기억 될 수 있어서 기쁘다 하셨다. 애국지사답게 항상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몸에 베어든 삶을 느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