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서예명가전’ 송성용, 최정균, 황욱 등 서예가 23인을 만나다
‘한국근대서예명가전’ 송성용, 최정균, 황욱 등 서예가 23인을 만나다
  • 김미진 기자
  • 승인 2020.06.25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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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풍미한 서예가들
송성용 -묵죽도

 강암 송성용, 남정 최정균, 석전 황욱 등 붓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서예가의 작품을 통해 안팎으로 위축되어만 가는 현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지혜를 구한다.

 (사)한국서예단체총연합회(회장 권창륜)와 예술의전당이 공동 주최하는 ‘한국근대서예명가전’이 8월 16일까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개최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강암 송성용(1913-1999), 남정 최정균(1924-2001), 석전 황욱(1898-1993) 등 전라북도 출신을 포함해 고봉주, 김기승, 김용진, 김응현, 박병규, 박세림, 배길기, 서동균, 서병오, 시희환, 손재형, 유희강, 이기우, 이철경, 정주상, 정환섭, 조수호, 최중길, 현중화 등 총 23명의 작고 서예가들의 작품을 선보인다.

 이들은 조선말부터 해방 이후 혼란의 시기를 온몸으로 부딪히면서 불굴의 예술혼으로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해온 대한민국 서예 1세대에 해당되는 대가들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작품만 접해도 그 의미가 상당한, 그야말로 한국 서예의 저력을 느낄 수 있는 전시인 것이다.

 전시되는 작품은 개인과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일중문화재단, 국립전주박물관, 강암서예관 등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로 일반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이 다수 공개돼 관심을 끈다.

 강암 송성용은 전북 김제 출생이다. 후세대들은 평생 한복으로 의관을 정제하며 생활했던 그의 모습을 기억한다. 일제의 강압에도 단방령을 거부하고 창씨개명을 끝내 하지 않는 등 항일민족정신이 누구보다 강했던 부친의 정신을 올곧게 물려받았기 때문으로, 그의 부친 유재 송기면은 조선왕조 말기 4대 성리학파의 하나인 간재학파 전우의 제자였다.

 학문 뿐 아니라 시와 서예에도 뛰어났던 부친으로부터 가학을 전수 받은 강암은 유·청년 시절에는 구양순, 미불, 동기창의 서체를 주로 공부하면서 성장했다. 30대 후반에 이미 모든 서체를 두루 잘 쓰는 서예가이자 여러 소재를 잘 그리는 문인화가로서 위치했다. 1956년 44세에 제5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 입선하며 서단에 공식적으로 등단한 강암은 이후 수회 입선과 특선을 거쳐 10년 후 제16회 국전에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해 한국서단에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그렇게 50년 가까이 초야에 묻혀 살던 강암은 지인들의 주선으로 전주에서 전시회를 열고, 1965년에는 전주로 거처를 옮겨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며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수많은 제자들을 둔 덕에 강암의 서맥은 전국적으로 탄탄히 흐르고 있는데, 지난 1967년에 결성된 제자들의 모임인 연묵회는 최근에 쉰두 번째 회원전을 성황리 개최하는 등 스승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다.

최정균 - 송운장 시
최정균 - 송운장 시

 남정 최정균은 전북 임실 출생이다. 고향에서 소년시절을 보내고 열여덟이던 1941년부터 원불교중앙본부에서 소태산 대종사의 종교적 가르침을 받았던 그는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에 의해 징병돼 전선에서 사경을 헤치고 해방을 맞아 돌아와 서른셋의 늦은 나이에 원광대학교에 입학해 공부했다. 그리고 1960년 본격적으로 서단에 진출할 뜻을 품고 소전 손재형을 찾아가 틈틈이 서예공부를 했다.

 남정은 예술가로서의 입지도 물론이지만, 1988년 원광대에 서예과를 창설해 그간 개인 서실에서 실기 위주로 공부하던 전통적인 서예 교육을 이론과 실기를 체계적으로 지도받는 제도교육으로 바꾸는데 큰 역할을 해냈던 교육자이기도 했다. 이후 원광대 서예과는 30여 년 동안 1,200여 명의 서예인을 배출하는 등 한국서예의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퇴임 후에는 모든 장서와 서화 소장품 및 작품 일체를 원광대에 기증하고 2001년 타계했다. 공산(空山)이라는 종교적 법호처럼 빈손, 빈 마음으로 떠난 자유로운 영혼을 추구했던 예술가다.

 석전 황욱은 전북 고창 출생으로, 5세때부터 한학과 서예를 익히며 군자의 도덕을 배웠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서울 중앙고보에 입학해 신학문을 익힐 기회를 가졌으나 일본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1920년 암울한 시대에 끓어 오르는 열정을 삭히고자 금강산으로 들어가 기거하며 한학과 서예에 전념했으며, 10년 후 고향에 돌아와서도 바깥세상과 단절한 채 오직 글씨만을 써왔다.

황욱- 위북 강동
황욱- 위북 강동

 그런 석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73년 일흔다섯의 나이에 작품 30여 점을 갖고 지방유지들의 초대로 전주 아담다방에서 회혼기념서예전을 열면서 부터였다. 특히 그는 ‘악필(握筆)’이라는 독특한 서체의 경지를 이룩한 것으로 명성이 드높다. 석전은 1960년경부터 오른손 수전증으로 붓을 잡기 어렵게 되자 왼손바닥으로 붓을 잡고 엄지로 붓꼭지를 눌러 운필하기 시작했다. 80대에 오른손악필의 절정을 이루었고, 이후에는 오른손악필도 어렵게 되자 왼손악필을 시도하는 등 노년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해내며 대작들을 남겨 귀감이 되고 있다.  

 권창륜 회장은 “여러 여건상 23분만 모시게 되어 아쉬움이 남지만, 이번 전시를 개최하게 된 의의는 한국서예의 전범을 바로 찾고, 나아가 새 시대의 한국서예의 위상을 정립하는 계기로 삼고자 하는 데 있다”며 “서예는 천문과 인문의 결합체로서 정신문화의 뿌리며 핵심이다. 서예술 행위는 모든 예술 사유의 근간이 되므로 상외지상(象外之象)의 시대성 추구 또한 서예인의 책무가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김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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