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정신 거대한 뿌리와 굴곡진 역사
전주정신 거대한 뿌리와 굴곡진 역사
  • 심옥남 시인
  • 승인 2020.06.18 15: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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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운동 100주년 기획, 글로 되짚는 전북 구국혼2 (1)전주1
조경단 ☞ 혼불문학공원 ☞ 황극단 ☞ 추념탑· 충혼각을 중심으로

<프롤로그> 전북도민일보가 광복회 전북지부와 함께 기획시리즈 ‘글로 되짚는 전북 구국혼Ⅱ’를 게재한다. 이는 지난해 항일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기획한 시리즈에 이은 것으로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국난에 맞서 싸운 전북의 호국정신을 되짚어본다. 문인들이 참여해 전북 시군의 독립운동시설과 정신문화유적을 따라가며 호국역사와 항일 독립정신을 바탕으로 우리민족의 자주정신을 스토리로 기행문 식으로 글을 엮는다.
  

<서문>  나라 전체의 의병가운데 2만 3천명이 전라도의병이었다. 그것도 강제가 아닌 자주적 지원이다. 풍요로운 고장이기에 더욱 많은 외세의 침탈이 있었고 여유로웠기에 풍류를 즐겼던 선열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창과 칼로 적의 총과 포를 대적했다. 그 용기와 용맹은 목숨을 내던진 애국이며 애족이었다. 전북 곳곳에 세워진 충혼 시설은 선열들의 구국혼이 영원히 활활 타오르는 불기둥이다.

■조선왕조 오백년 거대한 뿌리 조경단

날것의 아침이다. 문득 올려다 본 하늘, 구름의 유속이 빨라진다. 서둘러 굴곡진 역사의 아픔을 손잡기 위해 경건해져야겠다. 건지산이 품고 있는 전주 정신의 뿌리와 항일 독립정신의 발자취를 찾아 발걸음을 재촉한다.

전주(全州)라는 지명은 신라 시대에 처음으로 사용되어 천년이 넘는 현재까지 변함없이 불리고 있다. 전주는 40여 년 간 후백제의 도읍이었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본향이다. 조선시대는 전라감영이 있어서 전라남북도와 제주도까지 관활하기도 했다. 또한 한옥·한식·한지 등 가장 한국적인 전통문화를 보유하고 있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판소리의 본고장이다. 주변의 드넓은 평야와 바다가 연결되는 천혜의 지리적 조건은 풍요와 여유로움을 안겨주었고 이는 전주 정신의 바탕이 되었다.

전주 천년 역사를 이어가는 곳이 한옥마을이라면 조경단은 이 역사의 시작점이다. 나지막한 능선에 편백나무를 가득 품은 건지산은 예로부터 왕기가 서려 있어 제왕이 난다는 소문이 있었다. 길 안내 표지판이 없어도 길가에 세워진 하마비를 보니 근처에 조경단이 있다는 게 확실해졌다. 1973년 전라북도 기념물 3호로 지정된 조경단肇慶壇의 조肇는 시작하다는 의미다.

조선왕조가 비롯된 경사로운 자리라는 뜻의 조경단은 전주 이 씨의 시조인 이한의 묘역이다. 태조 이성계는 이 묘역을 정성을 다하여 지켰으며, 특히 고종 황제는 1899년에 총 1만여 평의 부지 안에 단을 쌓고 〈대한조경단〉비를 세워, 관리를 배치하고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고종 황제는 건지산에는 조경단을, 이목대에 목조의 유허비를, 오목대에 태조의 주필유지비를 세웠다. 이로써 전주가 시조 이한공의 21대 손인 태조 이성계의 선조들이 대대로 살았던 곳으로서 조선왕실의 본향임을 입증했다.

■구국의 혼 아직도 살아 있는 황극단 -타임캡슐(time capsule)

작가 정신의 본보기인 선생의 예술혼을 되새기며 혼불문학공원 맞은편 언덕에 있는 황극단으로 향한다. 안내 표지판은 어디에도 없고 두 갈래로 나누어진 계단 사이에 ‘황극단’이라고 새겨진 표지석이 나무에 가려진 채 있다. 계단 끝 작은 부지에 다섯 개의 비(고종황제 비, 이석용의병장 순국비, 김구선생 비, 대한장의순국5열사 비, 3·1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비)가 둥근단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역사를 압축한 타임캡슐 같아서 다섯 개의 비를 열면 조선 왕조 오백년과 일제강점기가 적나라하게 펼쳐질 것만 같다.

황극단은 전북 임실 출신 이석용 의병장의 장남 이원영 의사가 건립했다. 이석용 의병장은 1905년 을사늑약 때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일본 경찰에 붙잡혀 서른여섯 피 끓는 나이로 순국하기까지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살아서 황제를 모시지 못함을 애통해하며 황극단을 세워 선황제를 모시라는 아버지의 유훈을 받들어 세웠다. 이원영은 8년 동안 행상을 하면서 비축한 자금과 농토 2,600평을 매각해서 1955년 전북대 부지에 건립했다가 1978년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전북독립운동 추념탑·충혼각 - 날아라! 세계만방에 전북 애국 혼이여

계단을 내려와 멈추어 선다. 건너편에 전북독립운동 추념탑이 있는데 안내 표지판이 없다. 다만 전주어울림국민체육센터, 인라인롤러경기장, 게이트볼전용구장이라고 써진 표지판만 대문짝만하게 세워져 있다. 혹시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싶어 두 번째 방문을 해서 송천동 삼거리까지 확인해도 없다. 길가에서 보이지 않는 추념탑 안내 표지판, 이런 현실이 행정의 모순이며 불합리이다. 또한 후세들에게 잊혀 간다는 의미이다.

이곳은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항일운동을 하신 전북의 독립운동가 1,000여분을 모신 충혼각과 추념탑이 있다

독립운동추념탑은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을 펼치다 순국하신 전북지역 애국선열의 공훈을 선양하고, 영령의 숭고한 뜻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탑에 새겨진 글을 내 마음의 기도인양 옮겨 적는다.

 이 나라 이 겨레의 어둠과 슬픔과 분함일 때

 한 몸 불살라 밝히고 씻어 품으신

 전북의 님 님 님이여 거룩한 뜻 여기 기리옵나니

 나라의 겨레의 맥줄 앞날을 굽이칠 때마다

 전북의 본이요 빛이요 힘이 되실 님 님

 님이여 드높이 우러른 가슴 가슴 하냥 계시리이다

 

천지 사방에 꽃이 피고 새소리가 나를 현혹해도 가는 곳곳 선열들에게 묵념을 올리고 그 시대의 역사를 새겨 놓은 현판을 읽었다. 아픔이 전해질 때마다 해묵은 애국심이 일었다. 애국선열들이 목숨과 맞바꾼 나라를 나는 너무 무심하게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새로이 만든 전주정신의 길과 항일 민족정신의 지도는 조경단에서 시작되어 추념탑에 이르러 끝났지만, 역사는 정신의 긴 맥을 이 순간에도 이어 덕진 연못에 연꽃으로 피우고 있다.

 ■전북의 혼, 문학의 얼, 혼불문학공원 - 마부작침磨斧作針

조경단 주차장 한쪽에 창암 이삼만 선생의 글씨(鳶飛魚躍연비어약)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 ‘솔개가 하늘을 날고 물고기는 못에서 튀어 오르다’는 의미로 천지 만물은 타 고난 본성에 따른다는 뜻이다. 서울의 김정희와 평안도의 조광진과 함께 조선 후기의 3대 명필가라하니 어깨가 으쓱해진다. 창암 선생의 예술 정신이 조경단 맞은 편 혼불문학공원으로 길을 잇는다.

 

 가고 없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은 / 모퉁이가 많습니다

 한 굽이 돌아들면 옛이야기 들릴까 한 굽이 올라서면 그리운 이 보일까

 멀리 있어 아름다운 별보다 / 더 멀리 가버린 당신의 고통 사랑 그리움 눈물

 당신의 노래인 듯 싱그러운 호반새 소리가 / 발걸음을 숲 안쪽으로 당깁니다

 

 죽음을 안고 쇳덩이를 갈아 바늘을 만들 듯 써내려간 『혼불』은

 속살까지 환한 아픔들조차 여물어

 모국어의 보고요, 풍속의 보배로운 곳간입니다

 

 ‘뿌리는 지상의 햇빛이 캄캄하며 어둠은 휘황할 것이다’했지요

 내 기쁨이 누군가의 고통일 수 있다는 그 말

 어느덧 배롱꽃 벌어지면 / 당신의 계절이려니

 

혼불은 전라도 방언으로 사람 혼을 이루는 바탕을 가리킨다. 죽기 전에 몸에서 빠져 나가는 그 사람의 정신을 의미하는데, 더 나아가 지역 정신이며 나라의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최명희 선생이 17년 동안 사력을 다해 쓴 『혼불』 1만 이천여 장의 원고지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정신이자 그 역사였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큰 것이 마음이고, 마음 안에 담지 못할 것이 없다.”라고 한 『혼불』의 청암 부인을 통해서 선생은 그 의미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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