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의 첫사랑
그놈의 첫사랑
  • 송준호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 승인 2020.05.26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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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곡의 노래는 엽서 같아서]<11>

 “틀림없이 실망할 거라니까, 기어이 만난 거야?” “일주일이 멀다하고 전화해서 얼굴이나 한 번 보자고 자꾸 보채는 사람을 어떡해, 그럼? 솔직히 호기심도 좀 있긴 했지만….” “그래서, 만나보니까 어땠어? 괜찮았어?” “어휴, 말도 마라. 처음에 나는 걔네 아버지가 나오신 줄 알았다니까? 아주 그냥, 폭삭 늙었더라고….”

 카페에서 원고를 만지다가 뒤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를 그만 엿듣고 말았다. 괜히 민망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쪽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언뜻 눈길을 주었다. 쉰 살 어름의 여인들이었다.

 테라스 의자에 앉아 잔디마당에 떨어진 메마른 낙엽을 바라보았다. 40년 넘게 잊고 지내온 그 옛날 여고 1학년짜리 얼굴 하나가 가을바람에 수줍게 흔들리며 날아와 내 눈앞을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우리들 대부분이 알고 있는 첫사랑에 관한 진실이 아까 그 두 여인이 나눈 대화 속에 모두 들어 있는 건 아닐까.

 틀림없이 실망할 거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 친구도 같거나 비슷한 경험을 이미 했으리라. 남자는 첫사랑에 집착하고, 여자는 지금 사랑을 소중히 여긴다고들 했던가. 그 해묵은 속설은 얼굴이나 한 번 보자고 자꾸 보챘다는 그 남자가 입증해준 셈이었다. 그렇다면 여자들에게 첫사랑 남자는, 물론 다 그럴 리 있을까만, 단지 호기심을 자극하는 수많은 그들 가운데 하나일 뿐인가.

 적잖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속절없이 폭삭 늙어버린 첫사랑의 모습이야말로 차라리 만나지 말 걸 그랬다고 후회하게 만드는 대부분의 까닭일 게 분명한데, 그렇게 말하는 친구의 자존심이 상할까 염려해서 차마 대놓고 면박을 주기에는 뭐한, 다른 뜻 하나가 혹시 숨겨져 있었던 건 아닐까. 가령 이런 식으로….

 “당연하지, 그럼. 어쩌면, 아니 십중팔구는 그 남자도 널 만난 뒤 누군가한테 그랬을지도 모르거든. 말도 꺼내지 말라고, 처음에는 걔네 어머니가 나오신 줄 알았다고, 아주 그냥, 쭈구렁 할망구가 다 됐더라고, 그럴 줄 알았으면 애시당초 연락 같은 걸 하는 게 아니었다고….”

 사춘기 시절을 지나오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틀림없이 겪었을, 말도 많고 탈도 적잖은 ‘그놈의 첫사랑’을 어찌하면 좋을까 하다가 해묵은 노래 한 구절을 떠올린다.

 

 쓸쓸한 길에서 약속도 없이 우연히 마주서면 무슨 말을 하나요 세월이 흐른 뒤에

 

 장은숙이라는 가수가 허스키 보이스에 얹어 불렀던 이 <당신의 첫사랑>이라는 노래를 흥얼대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아까의 두 여인 덕택에 40년 가까이 잊고 지냈던 노래를 떠올리면서 내 첫사랑의 싹을 틔우느라 가슴 떨었던 그날의 추억을 새삼스럽게 소환한다. 그리고 노랫말로 쓴 몇 개의 단어에서 ‘그놈의 첫사랑’을 어찌하면 좋을지, 실마리를 끌어당긴다.

 옛날 생각이 나니까 얼굴이나 한 번 보자고 자꾸 보채서 만날 일은 적어도 아닌 것. 물론 ‘세월이 흐른 뒤’ 어느 날 ‘쓸쓸한 길에서 약속도 없이 우연히’ 마주치는 것마저 운명의 장난이라면 누군들 무슨 수로 거기서 달아날 수 있을까만….

 어쩌다 그런 순간이 찾아오면, 몰라보게 변해버린 서로의 모습에 속으로 어이없어 하다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적잖이 허둥대기도 하다가, 이내 표정관리 모드로 돌아서서 어색한 눈인사나 하릴없이 나누고는, 수십 년 전에 헤어졌던 그날 그랬듯, 또다시 기약 없는 시간 속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첫사랑이란, 혹시 그런 건 아닐까.

 아득해서 더 아련한 추억 속에 김장독처럼 묻어두었다가, 고1짜리였던 우리,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흰 눈 펑펑 내려 쌓이는 깊은 밤에 내 살던 시골 마을 성당 정문 근처로 소리 내지 않고 다가오는 너의 눈 밟는 소리 문득 다시 들려오거든, 그래, 심장이 16배속으로 뛰는 가슴으로 몰래 떠올려야 할 사람, 첫사랑은 그러니까, 본디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글 = 송준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송준호

 전북 진안 출생.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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