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으로 끌려간 여인들의 기구한 삶
병자호란으로 끌려간 여인들의 기구한 삶
  • 이복웅
  • 승인 2020.05.26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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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조반정(1623년 광해군15)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광해군이 지향하던 중립외교를 포기하고 ‘항명배금’ 즉 명나라를 따르고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을 표명했다. 이에 후금은 명나라를 침략하기 전에 조선부터 제압하기 위하여 1627년 1월 광해군을 폐위했다는 이유만으로 대군 3만명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 하여조선과 형제의 나라라는 ‘정묘조약’을 맺고 철수한다.

  조선을 굴복시킨 후금의 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지는 1636년 국호를 대청으로 변경하여 국력를 키워나갔다. 청 태종인 홍타이지는 조선에 대하여 명과 같은 군·신의 관계로 대하고 황금과 군대를 보내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조선은 이 요구를 묵살하자 1636년 홍타이지는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정벌에 나선 전쟁이 병자호란이다. 이 전쟁은 ‘정묘조약’을 지키지 않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침략한 것이다.

  청군은 파죽지세로 불과 15일만에 한양을 접수한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강화도로 피신하여 항전했지만 이미 전세는 기울어졌다. 1637년 1월22일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에 있던 세자가 “누가 나라 운명을 굳건히 하겠는가 나는 동생과 아들이 종사를 받을 수 있으니 내가 죽는다 해도 유감이 없다”(1637년1월 인조실록) 소현세자가 인질을 자청하여 협상은 빠르게 진행됐다. 여드레 뒤인 1637년 1월30일 삼전도(지금의 송파구 삼전동)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이마를 땅에 닿게 하는 ‘삼배 구고두’란 치욕의 예를 올려야 했다.

  청군은 1637년 2월 돌아가기 전까지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강화도를 함락하고 남한산성을 고립시킬 당시 전 군대에 포로로 50만 이상을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조선에 난리가 났다. 개별적으로 잡아들이던 청의 각 부대는 목표를 채우기 위해 조직적으로 포로 사냥에 나섰다. 청군은 노인과 어린이는 제외하고 젊은 사람만 골랐다. 젊은이 중에서도 사대부가의 젊은 여인들이 대상이었다. 재색을 겸비한 그녀들은 첩으로 인기가 높았으며 노예로 팔거나 나중에 조선에 귀향할 때 상대적으로 비싼 값에 몸값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많은 여인은 오랑캐에 끌려가는 것보다는 자신의 목을 찌르거나 우물에 빠져 죽었다. 일부는 가혹한 폭압에 가족을 보호하기 위하여 순순히 끌려가기도 했다. 최명길의 《지천집》에 의하면 끌려간 사람이 50만명이 넘었다고 기록됐으며 남한산성 저항 기록인 《산성일기》에서는 60만명이 이라고 했다. 또한 정약용은 《비어고》에서 60만명이 넘는다고 했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1천여만명이었으니 가족이나 친척들이 끌려가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 실록에는 “온나라 백성 중 태반이 연루되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포로 중에서 여인들이 차지하는 수가 20만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같은 공식 문서에는 포로 수가 얼마인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천신만고 끝에 심양에 도착한 포로 중에서 특이한 기술이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남자는 농장 머슴으로 여자들은 일부 재색이 뛰어난 사람은 궁중에 들어갔고 나머지는 첩과 창부로 또는 노예시장에서 팔려 가기도 했다.

  심양에서 탈출하여 압록강을 넘어오는 사람들도 많았었다. 이를 청나라에서는 ‘주회인’이라고 불었다 탈출한 사람은 조약에 의해 돌려보내야만 한다. 잡혀 온 주회인은 발뒤꿈치를 잘 버리는 형벌을 주기도 하였다. 이들의 고통은 죽음보다 더 참혹했다. 조선은 이들을 속환하기 위한 ‘속환사’를 두고 속환의 절차와 방법을 강구했다.

  1645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 간지 8년 만에 귀국하면서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가 원만해 지면서 속환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나갔다. 기록마다 다르지만 끌려간 여인 20만명중 환속한 여인은 2만5천명에서 5만명으로 추정돼 3분의 2가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이들 여인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감격도 있었지만 고국에서 1만명 이상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죽을 줄을 누가 알았을까. 이들 여인은 사대부와 평민에 이르기까지 그녀들에게 ‘환향녀’(일명 화냥녀)라는 사회적 낙인을 찍었다. 이 환향녀는 고향에 돌아온 여인이라는 뜻이었으나 오랑캐와 잠자리를 한 더러운 여자라는 악의적인 뜻으로도 회자하였다.

  정절을 잃지 않은 여인들도 환향녀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정절을 잃고 조선에 환속한 여인 ‘환향녀’들은 돌아갈 곳이 없었다. 여인들은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동구밖 나무에 목을 맸다. 또는 은장도로 손목을 긋고 가슴을 찌르기도 하고 깊은 강물에 몸을 던지기도 했다. 일부는 심양으로 되돌아 간 사람도 있었다 이들의 한은 전설로 그리고 자결한 ‘환향녀’의 기구한 사연으로 역사 속에 버려진 채로 전해 오고 있다.

 조선말 일제 강점기 시대에 정신대 일환으로 위안부에 끌려간 조선의 여인들이 일본의 만행에 대한 한을 품고 조국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고국에서 편안하게 보살피겠다는 한 시민단체를 향하여 배신자라고 외치고 있다. 절규하는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의 기구한 외침을 열정으로 경청해야 한다.

  두 번 다시 병자호란과 같은 ‘환향녀’의 한이 되풀이되어 우리 역사 속에 버려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이복웅<(사)군산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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