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분홍 봄날에
연분홍 봄날에
  • 김영주 수필가·동화작가
  • 승인 2020.05.19 17: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곡의 노래는 엽서 같아서]<10>

 내 어릴 적 모 방송국에서는 밤 아홉시 뉴스 시작하기 바로 전에 반드시 꼭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어린이 여러분, 이제 잠자리에 들 시간입니다.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납니다.’ 우리 가족은 그 말을 따라 ‘새 나라의 어린이처럼’ 어김없이 모두 불 끄고 잠자리에 들곤 했었다. 하지만 월요일은 예외로 TV를 훤히 켜놓았다. 아, 에너지 절약으로 전등은 끈 채로……. ‘가요무대’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반짝이 한복을 입고, 목 끝까지 넥타이를 꼭 맨 가수들이 노래를 불렀다. 그 동시에 내 엄마의 노래를 들었다. 구닥다리 노래가 연달아 흘러나오면 친정엄마는 흥얼흥얼 따라 불렀다. 어느 결에 난 ‘가요무대’를 보고, 내 엄마의 추억을 쫓아 그날처럼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진행자의 머리와 겉돌던 가발이 진짜처럼 세련된 것만 빼고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거의 없다.

 가다가다 가사를 몰라 끊긴 노래가 태반인 엄마가 유일하게 완창 한 노래 한 곡이 있다. 그것은 백 설희의 ‘봄날은 간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목이 ‘연분홍 치마’인 줄 알았던 바로 그 노래다. 가늘게 들릴 듯 말 듯 들려온 내 엄마의 음성은 어린 마음에도 참 슬펐다. 유독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서에 봄날은 간다.’가 구슬펐다. 엄마의 눈초점이 흔들리며‘꽃이 피면’을 부를 쯤 두 주먹을 쥐고 끼어들 준비를 했다. ‘잔잔잔’추임새를 넣어주는 내게 못 이겨 웃어주던 엄마…….

 지금 생각해 보니 엄마의 친정엄마인 외할머니가 하늘로 간 때가 쉰여섯이다. 내게 올 것 같지 않았는데 온 그날이 내게도 왔다. 엄마는 삼십 대 후반쯤이었을 터이다. 친정엄마의 부고를 듣고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 가서 장례만 치르고 서둘러 되짚어 와야만 했다. 엄마는 쉴 새도 없이 시어머니를 위해 밥상을 차렸다. 슬퍼할 새도 없이, 만사 귀찮다 누웠을 새도 없었다. 사적인 감정은 고사하고 몸을 가만 둘 틈도 없이 날이 가버렸다.

 분홍 꽃잎이 봄비 성화에 못 이겨 떨어지고, 눈이 시리게 너울너울 일렁였을 엄마의 봄날. 빛나는 초록, 여린 초록빛이 흔들린 날이 갔다. 그날은 이제 저만치 빠른 걸음으로 가고 있다. 초저녁잠이 많아져 저녁 7시 반이면 이제 한밤중인 엄마다. 간만에 통화를 하면 정작 할 말은 못하고 같은 말을 맞을 때까지 반복한다. 애먼 소리만 하다 전화를 끊곤 한다.

 “어디 아픈 데는 없으셔?”

 “뭐라고?”

 “아프지 않냐고?”

 “뭐라고?”

 “안 아파?”

 “요즘은 이렇게 귀가 안 들려.”

 “엄마, 아프지 마!”

 이제 귀가 어두워 ‘꽃이 피면 같이 웃고…….’백 설희의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와도 들리지 않는다. 금세 눈꺼풀이 내려가고, 고개 떨구고 만다. 다 늘어난 LP판처럼 늘어졌다 돌았다 한다. 그때는 너무 푸르렀던 봄날이어서, 이제는 다 지난 날로 갈 수 없는 봄날이어서 그 노래는 늘 먹먹하게 들려온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의 1절 가사)

 

 노래는 수많은 가수들의 입을 거쳐 요즘 핫한 ‘미스터트롯’의 젊은 가수가 이어 부른다. 사람 그리고 봄날은 가고 노래는 남아 부른다. 엄마의 봄날도 계절이 가고 또 오듯이 처량 맞든 아니든 다시 오면 좋겠다. 엄마의 노래가 듣고 싶어진다. 누가 그랬다. 그 노래는 ‘연분홍 초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해야 맛이 난다고……. 그의 엄마는 치마를 초마라 부른 탓이다. 이제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어서 그때 그 엄마를 흉내 내고픈 것도 그리움 때문이겠지…….

 

 지금 TV에서 CF가 나오고 있다. 아역 탤런트에서 하이틴 스타로 불리던 배우가 요실금패드 광고모델이 되었다. 봄날은 어느 결에 왔다 어느 결에 가고 없다.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봄날은 간다’, 이 노래가 처음 울려 퍼졌을 때 그 시대 피폐함을 위로했듯이, ‘같이 웃고, 같이 울던’가사는 먼 훗날 그리워 꺼내보는 한 장의 흑백사진이 되어 날 위로하겠지…….

 

 글 = 김영주 수필가·동화작가

 ◆김영주

 우석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한국아동문학인협회 회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