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잔디밭 위, 화살 같던 노래 - ‘오월의 노래 II’
봄 잔디밭 위, 화살 같던 노래 - ‘오월의 노래 II’
  • 곽병창 극작가
  • 승인 2020.04.14 18: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곡의 노래는 엽서 같아서]<6>

 엽서, 보랏빛? 젊은 트로트 가수 임영웅의 어질어질한 이별 노래, 열네 살 정동원이 처연히 그려내는 사랑의 쓸쓸함, 삶의 짙은 그늘, 이마가 서늘해지도록 끌어올리는 쎈티멘탈 로맨티시즘, 내 추억이라고 어찌 그런 노래 없을까? 엽서 같은, 아 그런데 이 엽서는 너무 무겁고 날카롭다. 전쟁 통에 날아온 군사우편처럼, 엽서 한 장에 운명이 담겨있을 것 같은-.

 해마다 오월이면 들려오는 ‘오월의 노래 II’의 원곡은 미셸 폴나레프의 ‘누가 할머니를 죽였나(Qui A Tue Grand’maman)’라고 한다. 그 노랫말에는, ‘누가 할머니를 죽였는가, ~나무 위에는 가지들이, 가지 위엔 나뭇잎들이, 꽃잎 위엔 새들이 노래했네~’라는 구절이 보인다. 쓸쓸하고 차분하다. 선율과 리듬도 평안하고 따뜻하다. 그런데 영화에도 쓰이고 광주항쟁 다큐멘터리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오월의 노래’는 아프고 무섭다. 왜 쏘았지, 왜 찔렀지? 언제 들어도 이 노래는 여전히 뒤통수를 서늘하게 한다.

 그 해 오월, 그다지 크지도 않은 나무 위에 아슬아슬 매달려 외치던 깡마른 전사 하나-. 흰 런닝 위에 붉게 쓴 ‘자유, 민주’의 선명한 글씨와 채 오십 명도 안 되던 시위대들-. 너무나 부드럽고 따뜻하던 햇볕-. 광주의 처절한 기억이 더 이상 가려질 수 없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던 1984년의 오월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노래가 아니었다. 분노와 두려움이 뒤엉킨 비명이었고 집단으로 외치는 주문이었다. 노래는 왜 그랬느냐고 처절하게 묻고 있었으나 답을 기다리지 않았고 ‘우리 가슴의 붉은 피’로 통곡하고 있었으나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넋두리하듯 천천히 부르면 한없이 부드러운 사랑의 고백처럼 들리던 그 선율-. 그러나 ‘두부처럼 잘리어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하고 솟구치면 이미 주변에 쭈뼛쭈뼛 서있던 우리들 눈동자는 붉게 젖었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피, 피-.’ 마침내 실핏줄이 모조리 터져 나올 듯한 눈빛으로 부르짖던 후렴구, 그것은 여전히 세상을 뒤덮고 있던 거대한 살육의 무리들을 향해 쉰 목소리로 날리던 화살이고 총탄이었다. 그 노래 아닌 거대한 소리의 회오리는 주변을 촘촘히 에워싼 전경들의 방석복과 검정색 가스차의 반짝이는 몸체에 막혀 좁은 하늘을 뱅뱅 돌며 울려오고 있었다. 하늘은 눈부시게 푸르렀고 학살자의 충견들은 잔인했다. 외치던 친구들은 마지막까지 쫓기고 찢기고 터지며 개처럼 끌려갔다.

 그로부터 몇 년 전, 팔십 년 오월에 나는 진도 바닷가 벼랑 끝 초소의 취사병이었다. 경운기에 실려 초소로 피난 온 예비군 무기고의 무기들과 거기 딸려온 늙수그레한 방위들, 벽돌만한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는 광주가 온통 폭도들의 천국이라는데, 방위들은 겁에 질린 목소리로 공수부대의 대검과 임산부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아, 그때 눈만 뜨면 내 눈 앞에서 몸부림치던 시퍼런 바다는 수십 년 뒤 사월에 다시 통곡의 바다가 되었다. 맹골 수로와 팽목항-. 바다를 보며 자식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던 이들-. 이 나라를 키운 건 팔 할이 눈물이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그 날 나는 그렇게 후렴을 남긴 채 끌려가는 친구들을 보면서도 입 속으로만 불쑥불쑥 왜 찔렀지, 왜 쏘았지 웅얼거리며, 삐져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밀어 넣으며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하지만 노래는 그렇게 꾹꾹 눌려지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짓눌러도 이미 심장 밑바닥에 자리 잡은 노래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말 못 하는 세월에는 선율로, 그마저도 가로막히면 웅얼거림으로 남았다. 가슴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그 노래는 머지않아 온 천지로 터져 나갔고, 마침내 캠퍼스 정문을 뚫고 세상의 거리로 성난 강물처럼 넘쳐흘렀다. 그 해 여름과 가을 사이에 나는 마당극을 몇 편 만들었고 가끔 금암광장 분수대까지 뛰쳐나가기도 했다. 물론 그 때는 이 노래를 더 이상 입속에서만 웅얼거리지 않았다.

 그러고도 세월은 흘렀고, 추억은 언제나 헛디딘 발자국 같아서 허약한 발목을 자꾸자꾸 겹질리게 한다. 추억에 주저앉아 돌이켜보니 나는 아마도 이 노래 원곡의 쓸쓸함과 새로 붙인 노랫말의 뜨거운 리얼리즘 사이 어디쯤을 서성거리며 참 잘 살아남았다.

 이 노래 ‘오월의 노래-II’의 작사가를 많은 이들이 찾아 나섰으나 끝내 찾지 못 했다. 이미 고인이 되었을 거라고도 한다. 세상에나, 그렇다. 노래는 누가 지었는지 모르고 노래만 남아있다.

 

글 = 곽병창(극작가·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곽병창

 대학연극반 시절부터 수십 년 동안 전주에서 연극을 해왔다. 극단 창작극회와 창작소극장 대표, 전주세계소리축제 총감독 등을 지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