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순창 쌍치 오룡마을 굴치 박잉걸치도비의 흔적을 찾아서
[특별기고] 순창 쌍치 오룡마을 굴치 박잉걸치도비의 흔적을 찾아서
  • 김진돈 전북문화재 위원
  • 승인 2020.04.13 17: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굴치 박잉걸치도비가 있는 바위

 굴치를 가려면 칠보에서 구절제 산길을 넘어 능교와 피노리를 지나 학선으로 접어들어야 한다. 온 산천은 벚꽃이 만발하고 들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오룡마을은 국사봉과 고당산에서 내재된 산 기운이 다섯 용으로 변하여 마을을 치닫고 있어 오룡마을이라 불렀다. 이곳은 그야말로 첩첩산중으로 알려진 두메산골이다. 사실 이곳은 굴티마을(현 수청저수지 자리)에서 올라가는 산길이었는데 지금은 저수지가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사용하지 않는 산길이 되었다.

 그런데 예전에 이곳에 거친 산길을 곱게 다듬어 사람들이 편하게 다닐 수 있는 길을 내준 사람이 있었다. 남을 위하여 길을 다듬고 다리를 놓아 주고 동네 앞에 입을 옷을 걸쳐 놓았다. 그 분이 바로 효자 박잉걸(1676-?)인데 그의 흔적은 찾아 나선 것이다.

쌍치 오룡마을에서 산을 넘고 계곡물을 따라 내려가면 정읍과 순창의 경계상에 커다란 바위가 두 개 있다. 주소는 쌍치면 학선리 산 276번이다. 사실 이곳을 가기 위해서는 혼자 갈 수 있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이 지역의 전문가인 이진우 정읍통문 대표와 김대연 좋은자리연구소장의 도움을 받았다. 거대한 바위에 도착하니 전체적으로 박인걸의 얼굴을 조각했다고 하나 바위 전체가 이끼가 자라 옷주름 같은 모양을 확실하게 나오는데 얼굴 있는 부분은 가름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커다란 바위를 받쳤던 받침돌이 물살에 휘말렸는지는 몰라도 약 30도 정도가 냇가쪽으로 기울었다. 큰 바위에는 비석이 2개 치석되어 있다. 비석을 만들 때 돌을 다듬어 만드는 방법도 있지만 현장에 있는 바위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즉 기념이 될 말한 바위를 잘 다듬은 후 글씨를 쓰고 새기는 방법이다.

 여기에 있는 굴치 박잉걸 치도비는 커다란 바위에 박잉걸의 전신상을 조각했다 전하고 있다. 아래 부분에는 그의 공적사항을 기록했다.

바위에 새겨진 박잉걸치도비와 박종수수도비의 전경
바위에 새겨진 박잉걸치도비와 박종수수도비의 전경

 현장을 도착해 보니 맑은 물소리와 봄꽃은 활짝 피었지만, 탁본할 채탁물이 손이 닿지 않아 준비해간 도구를 이용하여 사다리를 만들고 겨우겨우 공적비에 접근할 수 있었다. 명문은 다음과 같다. 

 上之二十二年乙酉八月旌閭孝子密陽朴公仍傑慕隱堂乾隆十二年丙寅三月治道碑(상지이십이년을유팔월정려효자밀양박공잉걸모은당건륭십이년병인삼월치도비)

 위의 문장은 크게 3줄로 되어 있지만 문장은 2개가 합쳐져 있다. 즉 상지 22년(1885) 8월에 밀양인 모은당 박잉걸은 효자 정려를 받았다는 내용이고, 뒷 부분은 건륭 12년(1746) 3월에 길을 닦았다는 기념비이다.

 흥덕군읍지를 보면 박잉걸이 효자로 정려를 받은 기록이 있다.

 朴仍傑吏曹判書忠元之七世孫號慕隱自幼識格孝養父母及其父病割股斷脂得延回蘇事 聞 命旌閭(읍지에 기록)

 즉 박잉걸은 ‘이조판서 충원의 7세손으로 호는 모은이며 어려서부터 격조를 알고 효로써 부모를 봉양하고 또 그의 아버지가 병들자 허벅지를 베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시게하여 회생하고 목숨이 연장되는 일이 알려지자 나라에서는 정려문을 세우도록 명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쿨티의 돌 계단으로 만들었던 흔적
쿨티의 돌 계단으로 만들었던 흔적

그리고 왼쪽에는 박잉걸이 굴치의 산길을 다듬어 많은 사람들이 편리하게 통행할 수 있도록 한 것을 기념한 치도비를 세운 것이다. 그는 칠보 백암리 사람으로 젊은 시절 부지런히 돈을 벌어 환갑이 되어 온몸에 비들이 돋는 병이 들었다. 이에 굴치 넘어 사는 아들이나 보고 죽으려고 고개를 넘는데, 산속에서 수염이 하얀 노인이 안개 속에서 나타나 “적선을 하시게.”라고 하고는 사라졌다. 이 말에 그는 깨달을 얻었고 바로 실천하기 시작한 것이다. 깨달음은 다른 것이 아니라 여태까지 자기가 살았던 길을 역으로 바꾸는 생활인 것이다. 추위에 떠는 자들에게 옷과 신발을 주고, 험악한 산비탈을 다듬어 고갯길을 잘 다듬고, 나쁜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남근석을 마을입구에 만들어 사고예방을 하였던 것이다.

박잉걸치도비의 좌측에 있는 또 하나의 비석은 사인 박종수수도비이다. 사인 박종수 수도비(士人 朴鍾洙 修道碑) 정해 삼월 일(丁亥 三月 日) 순창 태인 병입(淳昌 泰仁 立)이라는 글귀가 있다. 즉 박종수가 정해년 삼월에 굴치 도로를 수리하니 순창군과 태인현 주민들이 합심으로 세웠다는 내용이다.

 박잉걸의 치도비와 박종수의 수도비는 굴치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금석문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도로가 끊어지고 사람이 안 다니면서 여름에는 이곳이 울창한 산림으로 갈 수 없는 지역이 되었다. 지금도 산을 오르고 내리면 옛날에 닦았던 굴치의 돌계단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돌계단을 원형 복원하여 산림을 자원화하여 관광자원화한다면 아주 의미있는 곳이 되지 않을까 사료된다. 작은 빗돌에 새겨진 많은 사람에게 다리를 놓아 주고 구휼한 박잉걸의 흔적을 통하여, 현재 우리가 직면한 코로나19 사태를 맞이하여 다시 한번 새겨봐야 할 일이다. 이 금석문을 통하여 자기가 가진 것을 남을 위해 내놓는 정신만이 이 어려운 사태를 해결하는 신의 한 수가 아닌가 생각된다.

 

 글·사진 = 김진돈(전북문화재 위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