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피천득의 고백(告白)과 노재헌의 참회(懺悔)를 생각하며
수필가 피천득의 고백(告白)과 노재헌의 참회(懺悔)를 생각하며
  • 무울 송일섭
  • 승인 2020.03.26 14: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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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천득 수필가가 서울대학교에서 영문과 교수로 근무할 때 한 후배 교수가 피천득 선생에게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 한마디 해주세요.”라고 하자 피천득 수필가는 한참 머뭇거리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젊은이들에게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기 전에 여러분에게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일제강점기 때 친일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인 항일도 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숨어 있기도 했고, 두려워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가장 미안한 점이에요.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출처 : 김제동 《당신이 허락한다면 나는 이 말을 하고 싶습니다》(2018) 84쪽 -

 

 필자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안타까웠지만, 정말 많은 위안을 받았습니다. 그런 예쁜 마음이 주옥같은 글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지식인들이 일본의 집요한 회유와 강압에 홀딱 넘어간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지요. 문학계에서는 소위 ‘친일문학’이 세(勢)를 이루지요. 친일문학이란 ‘일왕을 찬양하고, 일본 국민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일본에 감사하는 내용을 일본어로 쓴 문학작품’입니다. 많은 문인이 이에 가담했고, 1939년 10월에는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조선 문인협회(회장 이광수)가 결성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친일문학자들은 42명이라고 합니다. 찬찬히 한 번 보세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분들이고, 50세 이상의 독자라면 학교에서 아주 열심히 배웠던 작가들이라는 것을 알고 놀랄 것입니다.

 

 시인 -김동환 김상용 김안서 김종한 김해강 노천명 모윤숙 서정주 이찬 임학수 주요한 최남선

 소설ㆍ수필ㆍ희곡-김동인 김소운 박영호 박태원 송영 유진오 유치진 이광수 이무영 이서구 이석훈 장혁주 정비석 정인택 조용만 채만식 최정희 함대훈 함세덕

 평론-곽종원 김기진 김문집 김용제 박영희 백철 이헌구 정인섭 조연현 최재서 홍효민

 

 이런 와중에서도 이육사와 윤동주 시인은 일제와 맞서다가 목숨을 바쳤고, 신석정 시인은 부당한 현실에 맞서 절필(絶筆) 선언을 했습니다.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 등 청록파 시인은 자연과 토속적 정서를 표현함으로써 우리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자 노력하였지요. 일제에 대한 반감과 저항의지를 간접적으로 표출한 것입니다.

 

 피천득 수필가는 친일(親日)은 하지 않았지만, 항일(抗日)운동을 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어땠습니까. 친일문학자들은 해방 직후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문학의 주류(主流)로 군림하면서도 그 누구 한 사람 참회록 같은 것을 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그렇게 쉽게 일제가 망할 줄 몰랐다고 변명을 늘어놓았지요.

 이것이 어찌 문학계만의 일이겠습니까? 정계, 관계, 교육계, 기업 등에서 활약한 친일파들의 행태는 지금도 그 뿌리가 면면(綿綿)하니 놀랄 일입니다. 일본의 아베 총리가 일방적 수출 규제를 할 때 이 나라의 많은 정치인, 지식인이 보여주었던 친일행태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오죽하면 사람들의 입에서 ‘토착 왜구’라는 말이 나왔을까요? 참회와 반성이 없는 것처럼 불행한 것은 없습니다. 얼마 전의 일입니다. 광주 망월동 518 희생자 묘역에는 아주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그분은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했던 신군부의 핵심,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노재헌 씨였습니다. 병상에 있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참회(懺悔)의 절을 올린 것이지요.

 

 우리 사회에 금아 피천득 수필가와 같은 고백이, 노재헌 씨와 같은 반성과 참회가 있기에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코로나 19로 매우 어수선합니다. 흑색선전, 가짜 뉴스가 횡행합니다. 피천득 수필가나 노재헌 씨처럼 고백하고 참회할 줄 아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양지에서 새롭게 희망을 펼쳐 내기를 소망해 봅니다.

무울 송일섭 (네이버 염우구박 블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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