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오목대, 정몽주 우물과 우국시
전주 오목대, 정몽주 우물과 우국시
  • 김우영
  • 승인 2020.02.13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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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를 상징하는 유적의 으뜸은 아무래도 오목대가 아닌가 싶다. 오목대는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황산 대첩에서 왜군에게 대승하고 귀경하던 중, 전주를 지날 때, 자신의 선조가 살았던 이목대가 있는 마을의 종친들을 초대하여 전승 잔치를 벌였던 장소이다. 잔치가 무르익었을 때, 이성계가 호기롭게 노래를 불렀는데, 노래의 내용이 중국 한나라 태조 유방이 자신의 고향, 패군 풍현에서 열었다는 전승 잔치에서 부른 대풍가였다. 대풍가를 부른 것은 이성계가 자신 선조의 고향에서 조선 창업의 포부를 밝힌 것으로 해석되었다.

 오목대는 이성계의 조선 창업과 관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목대의 주변에 조선의 창업을 끝까지 반대한 정몽주의 이야기가 여전히 회자하는 것은 역설적이다. 최근 정몽주의 유적이 하나 더하여졌다. 오목대에서 전주천을 건너, 무형유산원에서 산성천을 따라 남고산성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정몽주 우물’이라 이름을 붙인 우물이 옛 모습을 상상하여 복원되었다. 그 우물의 연원은 이렇다.

 정몽주는 종사관으로 이전부터 이성계에 함께 말갈, 여진족 토벌에도 동행하였고, 황산 대첩에도 수행하였는데, 오목대에서 열린 전승 잔치에서 이성계의 대풍가를 듣고, 노여움을 참지 못해, 잔치를 빠져나와, 홀로 말을 몰아 전주천을 건너 남고산성으로 향하던 중, 목이 말라 우물가의 아낙네에게 물을 청하였다. 아낙네가 바가지에 물을 떠서, 산딸나무잎을 띄워 건넸는데, 잎을 불며 물을 마시는 동안, 갑자기 황학의 무리가 나타나 군무를 펼쳤다는 장소이다.

  정몽주는 그 우물을 지나 남고산성의 만경대에 올라 고려의 국운을 한탄하는 시, ‘전주 만경대에 오르다’ 라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천길 높은 산언덕에 돌길을 돌아들어/올라보니 장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네/푸른 산 희미한 곳이 부여국이고/누런 잎 휘날리는 곳이 백제성일세/구월의 드센 바람이 나그네를 시름겹게 하고/백년의 호기가 서생을 그르치게 하네/하늘가에 지는 해가 뜬구름에 덮여 버리니/서글프게도 개경을 바라볼 길이 없네’ 라는 시다.

 정몽주가 만경대에 올라 전주의 완산 칠봉 쪽을 보면서 지었을, 이 시는 정몽주의 우국시로 잘 알려졌다. 만경대가 있는 옛 쇠락한 백제성에서 바라본 멀리 보이는 이 지역을 정몽주가 부여국으로 표현함으로써 그의 마음을 더 잘 드러내 보인다. 북부여에서 남하한 고주몽이 졸본 부여에서 고구려를 건국하였고, 고주몽의 아들 온조가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함으로써, 백제는 부여족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이다. 백제는 성왕 때부터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함으로써 스스로 부여국임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정몽주의 시는 저물어가는 고려에 대한 우국충정의 마음을 누런 낙엽이 휘날리는 옛 백제의 고성이라는 장소와 중첩되어 더 잘 드러내 보인다. 정몽주의 변함없는 마음은 이방원의 회유를 권유하는 ‘하여가’에 대한 답가로서 ‘단심가’에서도 확인된다. 정몽주는 고려를 개혁하고자 하는 개혁가이면서도 고려의 역사와 문화를 계승하고자 하였다. 성리학적 질서를 강조했던 역성혁명의 진영에서 보면 정몽주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진영의 논리를 떠나서 정몽주는 여전히 우국충정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조선의 성리학적 질서로의 개혁은 과연 성공한 것일까? 조선의 개혁에서 아쉬운 것은 과거의 역사와 문화를 계승하는 문제를 소홀히 하였다는 점이다. 부여국으로부터 계승되어 온 고려의 역사와 문화의 전통이 잘 융합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성리학적 질서의 구축이라는 관점에서 배척되고, 서로의 이질성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전통적 문화와 새로운 문화의 융합은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사회적 과제이다. 진정한 개혁은 옛것을 새것으로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 문화와 새로운 문화의 융합을 이루어 내는 데 있다.

 김우영<전주교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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