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녹여 차를 끓이니
눈 녹여 차를 끓이니
  • 이창숙
  • 승인 2019.12.15 14: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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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66>
보이차, 우리기전과 우린후의 탕색이다.

 눈 내리고 고드름 열린 처마를 본 지 오래지만 상상 속 겨울은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하얀 세상이다. 겨울이면 그해 만든 차가 떨어질 때쯤이다. 차를 좋아하는 이들은 아껴둔 차를 잘 갈무리해 눈 오는 날을 기다려 눈 녹여 차를 마셨다. 지금이야 사계절 언제든 좋은 물로 차 맛을 볼 수 있지만, 선인들은 자연에서 모든 것을 얻었으니 기다림은 참으로 얄밉기도하고 즐겁기도 했을 터이다.

  정조의 사위 홍현주(洪顯周,1793~1865)의 ‘섣달 눈 녹인 물로 차를 끓이는 마음을 묘사한 「납설수팽다(臘雪水烹茶)」라는 다시(茶詩)가 있다.

 이 시는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고 일어나 찾아오는 사람 없음을 대문이 구름에 잠겨 있음이라 탓하는 글로 시작한다.

 

  계미년 겨울이라 섣달 12월에,

  중천에 해 뜨도록 남창(南窓) 아래에서 실컷 잠을 잤구나.

  대나무 문이 구름에 잠겨 찾아오는 이 없고,

  눈 덮인 매화나무집 속세와는 떨어졌네.

  흰 깁으로 봉한 옛 상자 가져다가 보이차(普洱茶)를 꺼내고,

  편지를 펴보며 천리 밖 그대 얼굴 … (중략)

 

  눈이 덮여 속세와는 멀어져 있고, 중국 연남의 벗이 보내준 차를 잘 봉해 두었다가 섣달에 눈 녹인 물로 차를 끓이기 위해 꺼내며 친구의 마음을 느끼는 장면이다.

 

  오지화로 수탄에 불이 붙기를 기다리는데,

  어느덧 돌냄비의 끓는 물 거품 솔바람 소리 들리네.

  아이종에게 맡기지 않고 몸소 차 달이느라,

  머리 위의 오사모는 반이나 기울었네.

  꽃무늬 자기에 담아 아름다운 빛 흐르고,

  한 사발 마시니 갑자기 답답한 가슴 열리네.

 

  차 끓이는 것을 아이종에게 맡기지 않고 손수 하는 것으로 보아 다급함인지 한치의 허술함도 싫어서인지 소중하게 차를 끓이는 대목이다. 여기서 수탄은 석탄을 가루로 만들어 뭉쳐 놓은 것으로 호귀가(豪貴家)들이 이것을 가지고 술을 데워 마셨다는 고사가 있다.

 

  통정(桶井)과 미천(尾泉)은 오히려 두 번째이니,

  차갑게 빼어난 맛 갈증 풀기에 알맞네.

  병 많은 이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차 마시는 일이니

  내년을 기다려 남겨 넣어두네.

 

  통정과 미천은 서울의 돈의문 밖에 있는 샘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눈 녹인 물이 최고라는 뜻이다. 답답한 가슴을 풀어주는 차 맛 때문에 내년을 기약하며 남겨두기까지 한다.

  눈 녹인 물로 차를 달이는 풍경이 겨울의 운치를 느끼게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 납설수(臘雪水)는 섣달 무렵으로 동지로부터 세 번째 날에 오는 눈을 받은 물이다. 성질이 차고 맛은 달며 독이 없어 여러 가지 독을 해독할 때 좋다. 술을 마신 뒤 갑자기 열이 날 때, 황달을 치료하고 독을 풀 때도 쓰인다. 이물로 차를 끓이면 차 맛이 좋으며 약을 달이면 약효가 뛰어나다고 한다. 또한 납설수로 장을 담궈 간을 맞춘 음식은 쉬지 않으며 머리를 감으면 윤기가 흐르고 얼굴을 씻으면 피부가 희어지면서 기미가 없어진다고 『동의보감』 「수품론」에 기록되어있다.

  지금은 환경오염으로 눈 녹인 물을 식수로 사용할 수 없지만 눈(雪)과의 추억을 생각하며 따뜻한 겨울 차 한잔을 마시면 좋을 듯하다.
    

 / 글 = 이창숙 원광대학교 초빙교수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은 격주 월요일자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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