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의병 「독립의군부」 새로운 평가를 받아야
근대 의병 「독립의군부」 새로운 평가를 받아야
  • 이복웅
  • 승인 2019.12.08 15: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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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한국의 의병은 일제 침략에 대한 무력항쟁으로 한말 초기 유생 의병들이 중심이 되어 개항기 개화에 반대적 입장에서 호국운동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즉 최익현등의 지도로 전개된 초기 의병운동은 대외적으로 무너진 봉건사회를 재정비하려는 운동이였다.

1895년 일본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과 이어 실시된 단발령, 그리고 내정개혁(갑오경장)은 한말 의병활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갑신정변 이후 일본의 무력 간섭으로 급격하게 추진되어 왔던 여러 개혁 조치는 조선의 주권을 침탈하는 식민 통치로 이에 대항하는 의병활동의 봉기를 촉진시켰다. 을미사변 역시 유교사상을 생활 철학으로 삼고 있던 일반 백성들의 정서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점에서 민족 감정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러한 민족 감정은 기울어저 가는 나라의 현실에 대한 의식과 맞 물리면서 일본에 대한 무력 항쟁으로 일어 나게 되었다. 근대 의병은 이러한 관점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이후 호남의 의병운동의 도화선 된 것은 1906년 4월 최익현과 임병찬이 결사한 태인의 무성서원 병오창의다. 이들은 정읍,곡성 등지를 거처 순창에서 거병하였다. 그러나 최익현 부대는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 병사들과 싸움에서 전투을 중단하고 말았다.

  최익현과 임병찬 등은 체포 되어 대마도로 유배 되었으나 최익현은 식음을 전패 순절하고 말았다. 일제하의 의병투쟁이 소규모적이고 산발적인 상태에 봉착되었던 근본 요인은 헌병과 경찰제도의 실시와 가중되는 탄압에 있었다. 따라서 무력항쟁으로서의 국권회복운동과 독립운동은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는 전환기를 맞게 됐으며, 국내의 경우 헌병과 경찰의 철저한 감시를 피해 지하조직으로서 비밀결사운동으로 전환 되어 갈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조직적인 의병활동의 일환인 독립의군 조직은 근대 의병의 최초가 아닌가 한다.

 1912년 11월 6일 고종의 밀령에 의해 조직되고 전개 되었던. 독립투쟁이 바로 독립의군부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전국적인 독립투쟁으로서 이전에 있었던 의병운동의 활동과는 달리 드러나지 않았던 특이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1914년 3월25일 고종이 비밀리 임병찬에게 내려진 교지와 밀령을 보면.

 “정2품 자헌대부 임병찬 명 독립의군지사 사령총장 전라남북도 순무총장 임병찬” 밀지에서 임병찬을 정2품 자헌대부로 삼아 전라남북도 순무총장에 임명한다는 교지인데 이 칙령을 볼 때 전국의 남북을 지역별로 나누었음을 볼수 있다. 아울러 지역 책임자를 순무대장이라는 직책을 임명하였다. 또한 지역별 순무대장에게 해당지역의 독립의군부 조직과 그에 필요한 인사 선발등 제반 사항을 순무대장에게 재량권을 주었다.

하지만 독립의군부의 투쟁방법과 방향은 고종의 칙령에 의해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종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보필할 수 있었던 인사들에 의해 조직과 방법이 토의 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러한 맥락에서 독립의군부의 조직을 중심으로 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각 지역별 대표의 선발은 국권회복과 독립정신이 투철한 인사로 조직되었다. 독립의군 조직은 이전부터 의병투쟁을 통하여 국권회복운동을 했던 인사이거나 조직 당시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인사가 주축이 되었다. 예을 들면 돈헌 임병찬의 경우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에 임명된 배경도 1906년 병오창의와 같은 의병투쟁을 지속적으로 해왔기 때문이다.

 1914년 2월23일 도와 군의 대표를 선정한 의군부의 조직을 보면 의군부 총대표 13명,각 도대표 14명, 각 군대표 302명, 총 329명으로 전국적인 군대를 조직 했다 이 조직으로 임병찬의 출신 지역에서는 옥구군대표 고봉민, 전오풍 등 20명, 임피군대표 이춘길 등 15명 도합 35명이 독립의군부에 참여 하였다. 독립의군부는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고 무력항쟁을 전개함은 물론 외부로부터 도움을 이끌어 내면서 조선의 독립을 회복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독립운동은 1914년 3월 23일 수원에서 동지였던 김창식이 체포되어 독립의군부 조직의 비밀을 자백하므로서 임병찬 등이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수포로 돌아 가고 말았다. 그동안 있어 왔던 의병 활동은 비조직적 소규모로 산발적으로 일어 났지만 대한독립의군부는 한말 정부의 수장이었던 고종에 의해 조직된 보다 적극적인 군사 조직이였다. 이러한 대한독립의군부는 근대 한국 의병사에 있어서 새로운 평가를 받아야 한다.
 

 이복웅 <사)군산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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