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송동 인봉리 후백제 왕궁터 복원을
노송동 인봉리 후백제 왕궁터 복원을
  • 안도
  • 승인 2019.11.1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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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훤 왕이 전주에 후백제를 세우며 ‘나는 감히 도읍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백제의 사무친 울분을 풀러 온 것뿐이다.’라고 했던 말을 되새겨보자. 후백제란 말은 후세 역사가들이 백제와 구분하기 위해서 붙인 이름일 뿐이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당나라를 끌어들여 당나라의 연호를 썼지만, 후백제만은 나라 이름을 떳떳하게 백제의 맥을 잇는다는 뜻으로 ‘백제’라고 선포했다.

 36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을 존속한 후백제 왕조는 왕궁이 어디였을까? 수도가 지금의 전주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정작 왕궁은 좀처럼 그 흔적이 드러나지 않아 애를 태웠다. 그런데 국립전주박물관이 후백제 역사 복원을 위한 기반 연구 과정에서 미궁에 빠진 도성은 지금의 전주시 노송동 인봉리 일원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일대에서 후백제 당대의 목조 건물은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이 없지만, 일부 석조 건축의 터들이 남아 이를 입증했다. 1948년부터 최근까지의 항공사진 등 다양한 매체를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 후백제 도성의 성벽을 확인했고, 이를 바탕으로 후백제 도성의 형태와 구조, 성벽의 축조 방식, 문지와 궁성의 위치, 도성의 규모와 방어체계를 규명해냈다고 발표했다.

 ‘인봉리 일대’가 후백제 왕궁 위치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로 왕궁을 두른 궁성 혹은 왕성으로 추정되는 성벽의 흔적을 들었다. 전주영상진흥원 동쪽에 궁성의 성벽으로 추정되는 길이 50m 토축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를 서벽으로 가정하고 기린봉 정상부에서 북쪽의 서낭당까지를 성을 동벽, 그리고 해오름APT에서 태고종 종무원까지를 북벽, 마당재~제일고~풍남초 까지를 남벽으로 설정했다. 평지인 서벽을 제외하고 나머지 성벽들은 기린봉 산자락을 활용했고, 주택단지 등으로 개발됐음에도 자연지형을 통해 성벽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다고 했다.

 필자는 이 보고서를 보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후백제 왕도가 천년고도 전주였다고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뿌듯하고 벅찼다. 이제 우리는 견훤 왕이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건국한 것을 만천하에 다시 천명하고 이를 복원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왕건이 건국한 고려 때 만들어진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는 궁예와 함께 견훤 왕을 천하의 원흉이고 도적이며 대 죄인으로 내몰고 있는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후백제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되살리는 일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요즘 우리나라는 ‘왕도 알리기’ 열풍에 휩싸여 있다. 예컨대 서울은 조선시대 왕도를 앞세워 도성을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발 벗고 나섰고 김수로 왕이 가야를 세운 김해는 ‘왕도김해 스탬프투어’로 관광지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리고 경북 문경군 가은읍에서는 견훤 왕의 사당과 ‘후백제시왕’ 위패를 소중하게 모셔놓고 있으며 충남 논산시 연무읍에는 견훤의 묘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고 있다.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때마침 전주시와 전주박물관에서 견훤 왕이 세운 후백제의 왕궁터 찾는 일과 전라감영 복원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 다행스럽다. 그동안 견훤 왕이 세운 36년 후백제 역사가 짧다며 왕궁터 찾는 일보다 전라감영 복원 매달렸던 아쉬움이 남기도 했는데 이제 우리도 후백제 민족의 후예로 그 정체성을 되찾아야 한다.

 조선 영조 때 쓴 <동사강목>은 후백제가 ‘백제의 옛 땅을 남김없이 차지해서 신라와 고려보다도 뛰어났다.’고 했다. 또한 견훤 왕은 외교 측면에서도 중국과 일본과도 긴밀하고 활발하게 교류하였으며 3국 중 제일 큰 세력을 형성했다고 한다.

 그동안 후백제는 후삼국시대 이후 유일하게 왕궁터를 찾지 못하는 나라였다. 이는 전주의 급속한 도시화로 대부분 궁성흔적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행정이나 학계에서 후백제 왕궁터를 반태산 일대 고토성, 물왕멀 일대, 동고산성, 전주부성, 인봉리 일대 등이라는 분분한 주장들도 한몫했다.

 이제는 노송동 인봉리 일대가 후백제 왕궁터로 밝혀진 이상 좀 더 확증적 보완과 복원으로 한옥마을과 더불어 역사적 관광지가 되었으면 한다. 역사는 승리자의 것인 동시에 기록하는 자의 것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제는 우리 스스로 역사를 바로 세울 때다. 없는 역사 만들지 말고 있는 역사를 자랑스럽게 복원하자는 말이다.

 안도<전라북도국어진흥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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