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물지 않은 전쟁의 상처 ‘전주형무소’ 민간인 학살 사건
아물지 않은 전쟁의 상처 ‘전주형무소’ 민간인 학살 사건
  • 양병웅 기자
  • 승인 2019.06.24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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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발발 제69주년을 맞아 전주 효자추모공원을 찾은 전주형무소 유가족 전국유족회장 성홍제(71, 왼쪽)씨와 유가족 신종회(73, 오른쪽)씨가 당시 전주형무소에서 발생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최광복 기자

한국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은 전국의 거의 모든 형무소에서 자행됐지만 오랫동안 사건이 은폐되면서 그 전모가 지금껏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역사의 침묵이 70년 가까이 계속되는 동안 지금도 전주시 어딘가에 파묻힌 주검들은 그 날의 진실이 밝혀질 때만을 목놓아 기다리고 있다.

 좌우 이념 대립으로 희생당했다는 이유 만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전주형무소 민간인 희생자들의 흔적을 유가족과 함께 만나봤다.  

 “70년 가까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가족이 있습니다, 남은 가족들에게는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가 돼 가슴 깊숙한 곳에 남았습니다.”

 한국 전쟁 발발 제69주년을 맞아 전주 효자추모공원에서 만난 전주형무소 유가족 전국유족회장 성홍제(71)씨와 유가족 신종희(73)씨는 사무침 가득한 표정으로 추모공원 뒤쪽 야산 기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대로 된 묘지 하나 없었지만 전주형무소 희생자들이 어디에 묻혀 있는지 확신하듯 이들은 손으로 이곳 저곳을 가리키며 걸음을 멈추고 희생자들을 위해 간소한 제사를 지냈다.

 성홍제씨와 신종희씨가 당시 민간인 학살 현장을 직접 목격한 것처럼 확신을 가질수 있었던 것은 당시 전주형무소에 근무했던 교도관 A씨로부터 10여년 전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다는 증언을 듣고 부터다.

 이후 신씨는 대학 교수와 관련 기관 등을 찾아다니면서 당시 민간인 학살 사태에 대한 조사를 벌였고 상당 부분 정황 증거와 증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유가족 신씨는 “우리가 서 있는 이곳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매장된 민간인 희생자들의 비명과 신음소리가 퍼졌을 것”이라며 “이들을 지금보다 좀 더 나은 환경으로 모셔서 편히 영면에 들도록 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유족회장 성씨도 “한국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은 전국의 모든 형무소에서 자행됐다”며 “특히 전주형무소(진북동)에서는 우리 군경과 북한 인민군에 의해 차례로 대량 민간인 학살이 이뤄졌다”고 입을 열었다.

 이어 성씨는 “지난 1950년 7월에는 군경이 좌익 관련자와 보도 연맹이라는 이유로 재소자 1천400여명을 학살했고 두 달 후인 9월에는 전주를 점령한 인민군이 보복이라도 하듯 지역 인사 600여명을 살해했다”면서 “좌우익의 이념 대립 속에 적법 절차 없이 2천여명의 무고한 민간인이 희생된 비극적인 사건이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당시 군경의 학살 수법과 주검 처리 방식이 매우 잔인하고 반인륜적이었다고 강조했다.

 신씨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옛 공동묘지와 건지산, 황방산, 소리개재 등이 학살 장소로 선택됐다”며 “다짜고짜 형무소에 들이닥친 헌병대는 수형인 명단도 없이 중형자부터 불러내 트럭에 싣더니 어디론가 끌고 갔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트럭 한 대에 20∼30여명씩 태우고 가 말뚝을 세운 뒤 가슴엔 검정색 표적을 붙이고 곧바로 총살을 감행했다”며 “심지어 군인들은 미리 파 놓은 구덩이에 시신을 던져 휘발유를 뿌린 뒤 불을 붙이기도 했다. 형무소로 돌아오는 건 항상 빈 트럭 뿐이었다”고 덧붙였다.

 또한 신씨는 “북한군의 소행 역시 악랄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은 총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마치 풀어줄 것처럼 희생자들을 한 명씩 불러내 흉기로 살해를 저질렀다”고 말했다.

 신씨는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이 떠오른 듯 한숨을 연거푸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

 그는 “아버지와 백부, 숙부가 죄를 뒤집어 쓴 채 지서(파출소)로 끌려간 뒤 법원에서 3년형을 받아 전주교도소로 이감됐고 결국 한국 전쟁이 터져 영영 아버지 얼굴을 볼 수 없었다”면서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한 아버지만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진다. 아버지를 다시 모실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라며 흐느껴 말했다.

 성씨 역시 “우리 아버지 역시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았지만 막무가내로 끌려가 질서유지위반(현 보안법) 혐의로 4년형을 받고 그 뒤로 소식이 끊겼다”며 “아버지가 모든 원한을 푸시고 평화로운 세상에서 영면하시길 그저 바랄 뿐이다”고 말했다.

 이들은 전주형무소 민간인 학살 사건이 오랫동안 은폐된 만큼 조속한 진상 규명과 유해 발굴이 실시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성씨와 신씨는 “한국 전쟁 당시 전주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 사건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면서 “전쟁의 특수 상황이었던 점을 감안하더라도 좌우익 이념 대립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국가 폭력이나 다름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이들은 “최근 민간인 학살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으나 관련 자료가 많지 않은 데다 당시를 증언할 분들도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면서 진실 접근에 한계를 보이고 있다”며 “더 늦기 전에 비극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진실을 규명하는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주시의 유해 발굴 사업이 일회성, 전시성에 그쳐선 안 된다”면서 “또한 여전히 파악된 유족 수가 80명 전후에 불과한 만큼 정부가 직접 나서 홍보에 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우리는 정부에 개인적 보상과 특별한 혜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억울하게 돌아가신 희생자들을 찾아 모시고 싶을 뿐”이라며 “공동 추모관을 설립해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영혼과 유족들의 상처를 보듬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병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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