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 흥망이 담긴 오목대 방문기
조선왕조의 흥망이 담긴 오목대 방문기
  • 양태석
  • 승인 2019.05.23 16: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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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절의 여왕답게 사방이 온통 초록빛으로 물든 지난 19일, 조선왕조 500년 역사의 흥망이 서린 오목대에 올랐다. 시원한 바람이 가장먼저 나를 반겨준다.

 전주시내 남쪽에 위치한 한벽당과 한옥마을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작은 언덕 위에 세워진 오목대(지방기념물 제16호)는 조선왕조를 세운 전주이씨에게는 상징적 의미가 있는 곳이다.

 1380년(우왕 6년) 8월 500척의 대 선단을 이끌고 진포에 침입했던 왜구를 맞아, 운봉에 있는 황산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대승을 거둔 이성계가 귀경길에 조상인 목조가 살았던 이곳에 들려 일가친지를 불러 모아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술이 거나해진 이성계가, 항우(項羽)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이 고향인 패(沛)로 돌아와 승전 연회석상에서 지어 부른 대풍가(大風歌)를 읊었다고 한다.

 大風起兮雲飛揚 큰바람이 일고 구름은 높이 날아가네

 威加海內兮歸故鄕 위풍을 해내에 떨치며 고향에 돌아왔네

 安得猛士兮守四方 내 어찌 용맹한 인재를 얻어 사방을 지키지 않을소냐.

그러자 종사관 정몽주는 이성계가 새로운 나라를 세울 뜻이 있음을 간파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길로 홀로 말을 달려, 남고산성의 만경대에 올라 비분강개한 마음을 시(석벽제영(石壁題詠))로 읊었는데, 그 시가 지금 남고산성 만경대 바위에 새겨져 있다.

 千刃崗頭石徑橫 천길 높은 산에 비낀 돌길을 홀로 다다르니

 登臨使我不勝情 가슴에는 시름이여

 靑山隱約扶餘國 청산에 깊이 잠겨 맹세턴 부여국(夫餘國)은

 黃葉賓紛百濟城 누른 잎 휘휘 날려 백제성(百濟城)에 쌓였네.

 九月高風愁客子 9월 바람은 높아 나그네 시름 깊고

 百年豪氣誤書生 백년의 호탕한 기상 서생은 그르쳤네.

 天涯日沒浮雲合 하늘의 해는 기울고 뜬구름 마주치는데

 矯首無由望玉京 하염없이 고개 돌려 옥경(玉京, 개경)만 바라보네.

 정몽주의 고려를 향한 충성심도 허사였던가. 이성계는 결국 조선왕조를 건국한다. 하지만 그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조선왕조는 해를 거듭함에 따라 쇠락의 길을 걷게 되고 마침내, 국운이 기운다. 조선왕조의 몰락을 거부하고 전통 왕조를 재건, 강건히 하고자 했던 고종황제는 1900년 오목대에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遺址)라는 친필의 비와 비각을 세운다. 이 비와 비각이 이곳에 세워졌다는 것은 전주가 조선왕조의 어머니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이성계는 그의 모태인 오목대를 찾았었고, 나라가 기울어 가는 것을 어떻게든 바로 세우기 위에 오목대에 ‘태조고황제주필유지’ 비를 세우고 자신의 정체성을 다잡으려는 고종황제의 마음 역시 그런 점에서 같다고 볼 수 있다.

 고종황제의 기울어가는 조선왕조를 살리기 위한 몸부림도 허사로 돌아가,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수레바퀴는 끝내 조선왕조의 몰락을 향해 치닫고 말았다.

 오목대에 남겨진 속 깊은 사연을 아는 이 몇이나 될까? 바로 아래 한옥마을은 관광객들로 붐벼 북적이는데 비해, 오목대는 찾는 이 드물어 쓸쓸하기만 하다. 한 시대 각광 받던 오목대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그 자리에 서있을 뿐인데, 오목대를 뒤로하고 내려오는 발길 따라 왜 그리 마음이 착잡한 건지.

 양태석 도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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