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의 긍지와 자부심
전주의 긍지와 자부심
  • 서정환
  • 승인 2019.04.29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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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판본(完板本). 그렇다. 완판본이야말로 전주의 자랑이고 전주인의 자존심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도 시민들 대다수가 완판본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사회 지도층 인사들도 예향이란 말은 술술 나오는데 완판본 운운하면 멀뚱한 표정이 된다. 신문광고에 ‘완판본의 고장’이란 구절을 넣었는데 인쇄되어 나온 것은 ‘원판본의 고장’이라고 나오는 실정이니 더 말해 무엇 하랴.

 완판본은 고등학교 교과 과정에도 나온다. 우리 모두가 고전문학 시간에 배웠던 것이다.

 완판본:조선 말기 주로 광무(光武), 융희(隆熙) 연간에 전주(全州)에서 간행된 고대 국문소설 목판본의 총칭, 전라도 방언으로 판각(板刻)되어 있고 문체도 경판본(京板本)과 달리 향토색이 농후함. 국어사전(동화사·새국어사전)의 풀이를 그대로 옮겨본 것이다. 말하자면 전주는 강력한 왕권의 중앙집권시대에 서울에 버금가는 출판의 본고장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는 책이 주로 필사를 통해 전파되었으나 차츰 독자층이 형성되어 수요가 많아지게 되자 자연히 목판으로 책을 인쇄하기에 이르렀다.

 박순호 교수(원광대)와 김해정 교수(우석대)에 따르면 우리 전북 지방은 닥나무의 주산지이기 때문에 전주 한지가 유명했고 지리산에서 목판의 재료인 판재를 구하기가 매우 용이해서 수많은 방각본이 나왔다고 한다.

 특히 방각본이 최초로 간행되기는 13세기경 칠보를 중심으로 한 태인에서였다고 한다. 태인지방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방각본이 간행된 이유는 호남지방의 경제적인 여유 때문이라고 연구자들은 보고 있다. 호남평야의 농토를 많이 가진 부농들은 머슴을 두고 일을 했기 때문에 책을 읽을 만한 시간이 있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 책이 많이 팔렸다는 것이다.

 이후 태인 간본의 영향을 받아 18세기 이후부터 1930년대까지 전주에서 찍게 된 완판본은 무려 141종이나 되고 권수로 헤아려 천여 권에 이른다고 한다.

 소설류와 비소설류로 나누면 소설류는 ‘열녀수절 춘향가’, ‘심청전’, ‘홍길동전’, ‘유충렬전’, ‘조웅전’ 등 20여 종이고, 비소설류는 ‘전운옥편’, ‘통감’, ‘사서’, ‘삼경’ 등 120여 종이 되었다 한다. 당시의 출판사로는 서계서포(탁종길), 다가서포(양진태), 양책방(양승곤), 완흥사(박경보), 문명서관(양완득) 등이 있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이와 같이 우리 조상들의 얼이 담긴 완판본과 태인본이 거의 타지방으로 유출되어 우리 지방에는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뿐만 아니라 전주가 출판의 본고장이었다는 사실마저 잊히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한탄스럽기도 하고 분노마저 느낀다.

 청주에는 이미 고인쇄박물관이 개관되었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을 제작한 흥덕사지 터에 위치한 청주 고인쇄박물관은 그 지역에서 간행된 고서, 목판, 활자까지 수집, 정리하여 전시하고 있다.

 우리 전주·전북도 이젠 좀 의젓해져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별로 눈에 띄지도 않게 ‘완판본문화관’이라고 초라하게 만들어 놓고 자랑만 할 것인가.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 반포했으나 성균관 유생들은 물론 양반사회에서 언문이라고 무시당해 온 것은 다 아는 사실. 전주의 완판본이 서민들에게 5일장을 통해 널리 보급되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는 사실.

 완판본은 단순한 책 보급이 아니었다. 서민들을 일깨운 문화의 보급이었다. 이 중차대한 일을 완판본이 해낸 것이다. 완판본을 소홀히 대접해서는 안 된다. 우리 전주가 대접하지 않고 누가 할 것인가.

 때늦은 감은 있으나 출판의 본고장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살리기 위해서는 시민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함은 물론이고 당국의 특별한 배려를 촉구한다.

 서정환<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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