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Inter-being)
흘러(Inter-being)
  • 김동수
  • 승인 2019.03.13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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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야심경」에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는 말이 있다. 곧 유형[色]이 무형[空]이고 무형이 곧 유형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물이 기화하여 구름이 되고 구름이 모이면 비가 되어 내린다. 만물은 이처럼 시시각각으로 모양이 변해가면서, 입자가 나타날 때는 색(色)으로, 입자가 소멸할 때는 공(空)이 되어 생기 소멸을 거듭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만 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알지 못한다. 사실 알고 보면, 이 처소 이대로(now here)가 모두 극락으로 이어져 있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에 늘 번뇌 망상에 시달리게 된다는 것이다. 색(물질)과 공(에너지), 유와 무, 선과 악의 양변에 머물러 현상의 본질을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삼라만상은 독립되어 있는 개별적 존재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통하여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나와 세계가 하나이자 전체, 곧 주체와 객체, 나와 타자, 인간과 자연이 서로 섞이면서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근본 원리를 깨쳐, 하늘에 구름이 끼어 해가 보이지 않아도 그 속에 해가 들어 있음을 알아차려, 세간의 어려움 속에서도 청정심을 잃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도 바다에서는 끊임없이 파도가 일었다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다. 파도는 이렇게 생멸(生滅)을 거듭하면서 존재하고 있다. 이것이 생자필멸(生者必滅) 거자필반(去者必返)의 세계다. 현상적으로 보면 바닷물과 파도는 다른 것이지만, 본질적으로 보면 바닷물과 파도가 다르지 않듯, 하늘과 구름, 인간과 자연도 서로 다르지 않은 불이(不二)의 세계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파도가 ‘나’라고만 여기는 집착에 사로잡혀, 파도가 일어날 때는 좋아했다가도 파도가 꺼지면 슬퍼하고 괴로워한다. 파도는 물의 출렁임이라는 일시적 현상에 불과할 뿐,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에 결국 본래의 자기의 공성(空性)으로 되돌아가기 마련이다. 이것이 대자연의 섭리요 색즉시공(色卽是空)의 세계이다.

 우리의 육신도 잠시도 쉬지 않고 늘 변하고 있다. 그대로 존재하는 듯 보이나 실은 그대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늘 새로운 물질로 교체되면서 눈에 보이 않는 곳에서 신진대사가 쉬지 않고 이루어지고 있다. 지금 나의 몸도 작년 아니 어제 혹은 잠시 전(前)의 내 몸이 아님이 그것이다.

 지금 나의 육신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날마다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파도와 구름들이 물(水)과 하늘로부터 분리될 수 없듯이, 나의 모습 또한 사실은 늘 다른 모습이면서도 결국 다르지 않은 불일불이(不一不二)의 나, 그것이 오늘 ‘나’의 모습이다.

 너와 나 사이에 / 무엇이 남아 있을까

 무엇이 남아 / 어제와 오늘 흘러가면서

 보이지 않는 그들 / 어디로 가고

 오늘의 나만 이렇게 / 서 있는 것일까.

 나는 이미 / 어제의 나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일의 나도 / 아직 아닌, 그 무엇

 그것들이 나를 싣고 / 지금 어디로

 흘러 흘러 / 가고 있는 것일까.

 - 김동수 「흘러-Inter being」 전문

 나 또한 물처럼 흘러, 구름처럼 흘러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변해 가고 있다. 물체처럼 시공간에 매여 있는 고정된 내가 아니라, 주변의 인(因)과 연(緣)에 의해 늘 새롭게 ‘되어지는 존재(inter being)’. 그래서 오늘, 또 어디로 ‘흘러/ 가고 있는 것일까’하고 존재론적 자문을 하게 된다.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면서 오늘도 우리는 영원 속의 한순간처럼, 우주 속의 한 원자로 살아가고 있다. 어디서 와서 또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그 영원한 니르바나, 저 언덕에서 손짓하고 있는 피안의 중도(中道)를 다만 지향하고 있을 뿐이다.

 김동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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