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용기 열사의 뜨거운 외침, 익산 만세운동
문용기 열사의 뜨거운 외침, 익산 만세운동
  • 이종호 기자
  • 승인 2019.02.11 17: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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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의 옛 이름인 이리에서는 1919년 4월 4일 정오 수천 명의 군중이 장터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시위에 들어갔으며, 일본 군경의 발포로 88명이 그 자리에서 피살되고 5명이 체포돼 총살당했다.

 앞서 3월 26일에도 많은 군중들이 목포행 열차의 승객들과 호응해 만세를 부른 일이 있었으며 일본군 보병 4연대의 1개 중대가 이곳에 주둔하고 전주, 군산, 익산 방면과의 왕래를 일일이 감시하였기 때문에 운동이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나 인접의 오산면 문용기와 박도현, 장경춘, 등 예수교 계통의 애국지사들은 감연히 일어나 이 교통이 혼잡한 이리에서 만세운동을 기도했다.

 그중에서도 명망이 있었던 문용기는 예수교 인사들과 계획을 정하고 4월 4일 이리 장날을 기해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했다.

 4월 4일 정오. 이리시장에는 예수교인들을 중심으로 300여명의 집단이 시장에 모였다.

 거기에는 서울에서 유학하다가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귀향한 중등학교 학생 김종현, 김철환, 이시웅, 및 박영문, 등 청소년들과 진작부터 전북지구로 내려와 활동했던 서울의전 학생 김병수도 포함돼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적의 헌병, 보병부대가 주재해 도내의 운동을 강압하고 있는 그야말로 적의 중심부라고도 할 수 있는 운동이니만큼 일사대결의 결심으로 참가했다.

 일동은 만세를 부르고 대열을 지어 행진했다. 독립선언서가 많은 사람들에게 배포되고 태극기가 휘날렸다.

 시장에 모였던 군중들이 같이 손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따라 다녔다.

 대열을 증가해 1천여 명에 이르렀고 일동을 기세를 올리며 시장을 돌았다.

 너무나 의외의 사실에 어리둥절하던 일경과 헌병대가 행렬을 저지하려했지만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적의 보병부대가 가세하며 무력을 행사했지만 대열은 흩어지지 않고 만세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적측은 소방대와 일본인 농장 원까지 수백 명이 동원돼 창검과 총, 곤봉, 갈고리를 마구 휘두르자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나고 앞장섰던 사람들이 쓰러졌다.

 그러나 문용기 열사는 태연한 얼굴로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앞에 서서 독립운동의 정당성과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강행했다.

 발악적인 적 헌병은 긴 칼을 휘둘러 태극기를 든 그의 오른 팔을 내려치니 팔과 함께 태극기도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쓰러지지 않고 다시 왼손으로 태극기를 주워들고 만세를 부르며 나갔다.

 악독한 적 헌병이 다시 왼팔마저 내려치니 두 팔을 잃은 몸으로 뛰어나가며 만세를 불렀다.

 적들이 다시 가슴을 찌르고 배를 찔렀지만 문용기 열사는 쓰러지면서도 끝까지 독립을 향한 외침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이리운동에서는 문용기 열사와 함께 박도현, 방경춘, 박영문, 서공유, 이충규 등도 순절했으며 김병수 등 10여명의 부상자를 내고 10여명이 검속 당했다.

 그러나 만세운동의 열기는 꺽이지 않고 이튿날인 4월 5일에도 군내 여러곳 산상에서 다시 횃불 만세시위가 전개됐다.

 그중에서도 함열면 산상에서도 충청도 강경지역을 연결하는 횃불 만세시위는 일대 장관을 이뤘다.

 4월 8일에는 용안면 화배리에서 청년 박영문, 김기동, 차팔용, 최팔만 등과 14세 소년 김귀동 이 주동이 돼 산상에 올라가 수차례 만세시위를 전개해 적들을 놀라게 했다.

 이보다 앞서 여산면지역에서는 천도교에서 제1세 교주의 추도식이 끝난 3월 10일 오후 9시경 군내 여러 곳 산상에서 횃불이 오르고 이 부락 저 부락에서 만세 소리가 메아리 쳤다.

 금마면에서는 장날을 이용해 3월 18일과 28일 2회에 걸친 만세시위가 있었다.

 그중에도 18일에는 왕궁면에 사는 김광덕, 송준석 등은 서로 만세시위를 할 것을 협의하고 금마시장으로 가서 친지들에게 연락해 오후 1시 경 시장 한 가운데 많은 사람들 앞으로 가서 “우리도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고 하며 친지들과 함께 선두에 서서 만세를 부르니 주위군중 수백 명이 호응하며 모두 만세를 불러 시장안의 감격과 흥분의 선풍을 일으켰다.

 춘포면에서는 3월 28일 오후 3시 경 청년 소지석 등이 주동이 돼 수백 명의 장꾼이 모인 앞에서 “우리 조선 사람으로 독립을 원치 않는 이가 어디 있느냐? 각처에서 모두 만세를 부르니 우리도 독립을 경축하는 만세를 부르자”고 외치자 군중 속에서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나오고 온 군중이 소리를 모아 만세를 불렀다.

 이 같은 만세운동으로 김광석, 송중석, 이정, 박사국, 이병석, 고채주, 김치옥, 강성원 등은 광주고등법원 전주지청에서 1년 내지 1년 반의 징역을 언도받았는데 서울 고등법원까지 상고 항쟁했으며 김치옥은 고등법원에서도 만세운동의 무죄를 주장했다.

 대한민국이 독립된 후 1948년 3월 1일을 기해 이 지방의 유지인사들은 익산시 인화동에 위치한 구 시장에 문용기 열사 3.1운동 기념비를 세웠으며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비문을 지었다.

 이리 지역의 항일 운동을 기리는 기념비는 광복절에 맞춰 1971년 8월 15일에 제막하고 국가보훈처 현충 시설물로 지정됐다.

 

이종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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