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의 만세운동 불을 댕긴 정읍 태인 만세운동
호남의 만세운동 불을 댕긴 정읍 태인 만세운동
  • 이종호 기자
  • 승인 2019.01.14 17: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북의 3·1운동 <3>

 정읍 태인에서도 100년 전 3월 16일 정오를 기해 태인 장터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됐다

 .3.1운동 직전 고종황제 국상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 갔던 태인면 청년 김현곤, 송수현, 박지선 등은 김성수, 송진우, 등 전라도 출신 인사를 만나 3.1운동 계획을 알고 곧 선언서 등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송한용, 송진상, 오석홍, 송영근, 김진호, 유치도, 심순곤, 배복산 등과 독립운동을 논의하고 3월 16일 태인장을 기회로 일제히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정하고 인근 각지의 동지들을 규합하고 연락했다.

 당시 태인면사무소 서기로 있던 김현곤은 면사무소 등사판을 내다가 송한용 집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수천 장을 등사했다.

 정오 경 장꾼 들이 많이 모여들기를 기다려 박지선, 송한용, 송진상 등 동지 천년들은 몇 명씩 짝지어 준비했던 태극기와 선언서를 장꾼들에게 나눠줬다.

 5~6명의 청년들은 보통학교 생도졸업생 200여명과 일단이 돼 면사무소 부근에서부터 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해 나가니 시장에 모여있던 수천명의 군중이 일제히 호응했다.

 갑작스레 일어난 큰 사태에 헌병들도 감히 손을 대지 못했다.

 노점은 철수되고 상점은 문을 닫았다. 일부의 대열이 주재소 앞으로 달렸는데 헌병과 보조요원이 나와서 제지했다.

 실랑이 끝에 적의 무리는 총을 겨누고 위협하며 일부의 보조원은 애국 동포들을 구타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군중은 더욱 격분했다. 군중의 위세에 눌리고 양심의 가책을 받은 보조원은 몸을 숨기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 헌병의 응원군이 도착하고 무력제지가 심해지니 평화의 대열은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으며 송진상, 김현곤 등 청년 5명이 구금됐다.

 그런데 날이 어두워지면서 다시 구 태인읍을 가운데 두고 주위 사방 산마루에서 횃불이 오르고 대한독립 만세 함성이 울려 나와 산으로 마을로 메아리 쳐 나갔다.

 산상에 높이 울려 퍼지는 봉화와 밤의 정적을 깨고 울려 퍼지는 대한독립 만세의 함성은 보고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한 층 감격시켰다.

 동리마다 집집마다 대한독립 만세 소리가 울려나왔다.

 집을 뛰쳐나와서 4~5명 또는 수십명이 대열을 져 골목길을 누비며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이렇게 야음을 이용한 산상만세와 소집단의 만세는 10여일을 두고 계속됐다.

 일본 측에서는 일본인 거류민까지 동원해 밤을 세워가며 경계했으며 80여명의 애국동포를 강제 검속해 정읍 헌병분대로 보내기도 했는데 그중에서는 태인보통학교 훈도 김승호, 곽정렬과 응동면 면서기 송병옥 등도 있었다.

 태인 만세운동으로 전후 적측에 검속당한 애국동포들은 저들에게 갖은 고문과 곤욕을 받았지만 끝내 기개를 굽히지 않고 적 헌병과 법관들에게 항쟁했으며 가족들도 온갖 고초와 학대를 당하면서도 적개심을 버리지 않았다.

 김현곤, 박지선, 송한용 등 많은 애국지사들은 6개월 내지 1년 반의 옥고를 치르고 나와서도 상해 임시정부의 파견원들과 연락해 가며 군자금 모집에 종사하는 등 구국활동을 계속했다.

 정읍 읍내에는 왜 헌병부대와 광주 지방법원지청이 있었고 일본인들이 와 있었기 때문에 저들의 경계가 심하여 봉기가 용이치 않았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천도교와 기독교 교도들과 뜻을 통해 오던 이익겸, 박환규는 태인 시위가 있은 후 3월 23일 정읍 장날을 기해 시위를 벌이기로 정하고 계획을 추진했다.

 천도교 교인들은 각 마을의 교인들에게 연락을 하고 기독교인들은 전도사가 돌아다니며 만세시위에 참가하도록 권유했다.

 그런데 불의의 사태가 벌어졌다. 거사 전날 밤인 22일 밤 왜 헌병대의 급습을 받아 준비했 던 독립선언서, 태극기를 모두 빼앗기고 만 것이다.

 다음날 시장에는 시위군중들이 모였으나 주 도인물이 없어 100여 명이 ‘독립만세’를 한번 외치고 헤어지는데 그쳤다.

 며칠 지나서 4월 2일 장날 덕천면 송기룡, 박재구와 읍내 도상철, 박근수 등이 군중의 선봉에 나서 ‘독립만세’ 를 외치고 나가니 군중들이 모두 이에 호응하여 장터는 만세의 함성으로 진동했다.

 왜 헌병들의 출동으로 송기룡 등 일부 주동인물이 검속당하니 따르던 군중들은 자연히 해산됐다.

 이를 전후로 정읍군내에서는 여기저기 야간을 이용한 산발적인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영원면 나용균은 중국으로 나가 상해 임시정부 대의원으로 활동하는 가하면 그의 형 나홍균은 많은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제공하고 선만물산을 만들어 국내 연락기구로 삼기도 했다.

 이익겸, 박환규는 주동인물들이 저들에 피검돼 정읍재판소에서 징역이 선고되었으니 박 환규 징역 1년, 이익겸 징역 10월의 형을 받았다.

 100년 전 선열들의 3.1운동 봉기정신을 계승발전 시키기 위해 지난 1984년 정읍 성황산 자락에 주민의 성금과 예산으로 기념탑을 건립하고 매년 3월 1일 기념식을 거행했다.

 하지만 기념탑의 붕괴위험이 있어 2003년 12월 국비 3천만원과 시비 3천500만원 등 6천500만원으로 기념탑 복원과 함께 위패봉안소를 건립해 25명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으며 지난 2005년에는 익산보훈지청으로부터 국비 3천만원을 지원받아, 태흥리 오리마을에 만세비를 설치하고 3.1운동 밀회장소를 정비했다.

 
이종호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