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날에 맞춰 시작된 전주의 3·1운동
장날에 맞춰 시작된 전주의 3·1운동
  • 이종호 기자
  • 승인 2019.01.01 17: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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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 3·1운동 <1>

 3·1운동을 통해 우리는 한국인으로 새로 태어났다. 3·1 운동을 계기로 다음 달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기 때문이다.

 헌법 전문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며 대한민국 건국의 원천이 바로 3·1운동에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3·1운동과 기미 독립선언서는 종교간, 계층간, 남녀간의 차이 등을 모두 뛰어넘어 ‘민족자주’라는 직접적인 목표와 ‘신문명구축’이라는 원대한 포부를 향해 우리 민족이 세계 인류에게 고한 대헌장과도 같은 가치를 담고 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 그동안 남북분단과 6.25전쟁 같은 수많은 시련과 아픔이 있었지만 우리민족은 한강의 기적을 통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발전했고 극적인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대결의 시대에서 남북화해의 시대를 이끌어내 세계가 주목하는 위대한 통일의 역사를 앞두고 있다.

 이 같은 바탕에는 외세에 저항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던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다. 우리 전북은 일제에게 경제적 수탈을 가장 많이 받았던 곳이기 때문에 유난히 독립투사들이 많았다. 당시 호남지방에서 일어난 의병활동 횟수와 의병에 참가했던 숫자를 보면 1908년에는 전국의 4분이 1이었으며 다음해인 1909년에는 전국이 절반을 차지했다. 3·1운동 당시에도 우리 전북은 모두가 함께 일어나 일제에 저항했다.

 당시 일본 헌병이 휘든 칼에 태극기를 움켜진 팔이 잘려 나가자 다른 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다 두 팔과 온몸이 난자당해도 굴하지 않고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던 익산의 문용기, 무장운동으로 일제에 항거한 한국의 아나키스트 정현섭, 백정기, 민족독립운동에 헌신한 목회자 김인전 등 1천 명 이상의 애국투사들이 있었다.

 잘 알려지지만 않았을 뿐 우리 전북에도 안중근과 유관순 못지않은 사명과 열정으로 독립투쟁을 벌였던 의사와 열사가 많았던 것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2019년, 1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그날의 생생했던 독립의 함성과 그들의 열정을 2부에 걸쳐 조명한다.

 1. 장날에 맞춰 시작된 전주의 3·1운동

 3월 1일 오전, 당시 전주군 천도교 교구실에는 서울에서 온 인종익에 의해 독립선언서 1천 여장과 독립운동의 행동 방법이 전달됐다.

 천도교구 직원 김진옥, 배상근 등이 천도교구실 등사판을 이용해 독립선언서 수천 장을 등사하는 등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이들에 의해 곧 임실군 천도교 교구실 및 익산, 이리, 함열, 김제, 옥구, 무주. 정읍, 태인, 고창, 금산, 순창, 부안 등 각 지방으로 전송됐으며 천도교 신자 김태경, 민영진, 서호순, 유선태등은 전주 읍내의 도로, 기타 요소 및 각 면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 시위를 계획했다.

(현)신흥고등학교 전경.

 개신교계는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가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등을 준비했다.

 그런데 선언문이 전주 및 도내 각지에서 발견되면서 적측에서는 이들 종교단체에 대한 감시가 엄중했다.

 일부 인사의 검속도 있었고 미연에 방지를 위한 조치도 취해졌기 때문에 일이 순조롭지 만은 않았다.

 그러나 애국지사들의 의기는 꺽이지 않았으며 3월 13일 전주 장날을 기해 거사할 것을 확정했다.

 일제는 각 지방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됨에 따라 각 학교에 일시 방학조치를 취했다.

 그 중에서도 예수교는 그 계통의 신흥, 기전 남녀 학교 학생들에 대한 동원계획을 세웠는데 방학과 함께 학생들이 흩어져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만세운동에 큰 지장을 주는 것이이었다.

 만세운동을 주동하던 최종삼, 김가전, 윤건중, 이수연 등은 의사를 통할 수 있었던 학생들에게 긴급연락해 귀향을 보류하는 한편 신흥학교과 기전학교의 일부 학생들과 침식을 같이 하며 신흥학교 지하실 등에서 호롱불 밑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했다.

 드디어 1919년 3월 13일 전주읍 장날.

 며칠 전부터 전주 시내에는 이날 만세시위 운동이 일어난다는 말이 돌았기 때문에 일제 헌병과 경찰들은 삼엄한 경계망을 펴고 모여드는 장꾼들을 예민하게 주시했다.

 그러나 채소 가마니로 위장된 태극기는 남문장 거리까지 무사히 운반됐다.

 정오경 남문에서 울려나오는 인경 소리를 신호로 천도교‧개신교 신자,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약 150명이 남문시장에서부터 태극기를 들고 만세 시위를 시작했다.

 기전 여학생들은 장꾼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줬고, 신흥학교와 전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시장에 나온 장꾼들도 만세운동에 호응하며 대한독립 만세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대열이 증가했다.

 김봉춘은 앞에서 인도하고 이운영은 태극기를 두 손에 휘두르며 군중을 격려했으며 이명수는 “대한사람으로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지 않는 사람은 반역자!”라고 외쳤다.

 시위군중은 남문에서 공립제2보통학교, 대화정을 지나 대정정 우편국 앞까지 행진했다.

 우편국 앞에서 총을 발사하는 일제 경찰과 부딪친 만세 시위대는 일시 해산하였다가, 오후 3시 다시 모여 본정 우편국까지 행진했다.

 일제는 헌병과 소방대원 약 50명을 동원해 군중에게 물을 끼얹고 소방 갈고리로 부상을 입혔다.

 시위군중은 밤에도 2~30명씩의 집단으로 도청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행진했다.

 이 날의 만세 운동으로 전주 읍내에서 300여 명이 검속됐다.

 그러나 다음날인 14일도 만세운동은 계속됐다.

 박상선, 백남두 등 약 300여 명이 완산정 완산교 부근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본정2정목까지 진출했다.

 23일 전주 장날에는 수천의 군중이 태극기를 들고 군청‧경찰서‧재판소가 위치한 큰 거리를 지나며 시위행진을 하다가 긴급 출동한 일제 경찰에 의해 해산 당하고 20여 명이 체포됐다.

 그러나 다시 소집단 소부대로 시내 각처에서 나타나 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운동으로 검속당한 많은 애국 동포들은 적의 모진 고문을 당했지만 민족의 긍지와 의지를 굽히지 않고 않았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박완, 이양호 등이 긴밀히 연락을 취하며 활동을 전개했고 이병두는 서재록, 김기곤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성립 축하문을 배포해 민중들의 독립사상을 고취했다.

 

이종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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