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질‘로는 어떤 변화도 가져올 수 없다.
’꼰대질‘로는 어떤 변화도 가져올 수 없다.
  • 송일섭
  • 승인 2018.11.01 16:5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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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정치권에서는 또 ‘꼰대논쟁’이 불거졌다. 한 야권 인사가 ‘태극기 부대’를 보수의 대통합차원에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자, 다른 분은 이에 맞서 ‘보수의 공멸’을 자초할 것이라며 ‘꼰대론’에 불을 지폈다. 한 언론에서는 ‘그 분이 나를 경고할 위치에 있는가’라며 발끈했다는 야권 인사의 대응을 전하면서 ‘꼰대자가검정테스트’라는 자료를 소개하였다.

‘꼰대’라는 말은 처음에는 ‘아버지나 교사 등 나이 많은 남자를 가리켜 학생이나 청소년들이 쓰던 은어’다. 근래에는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이 말은 어른이나 윗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참 고약한 말이다. 힘을 보탠다고 무슨 말이라도 할라치면 곧 바로 ’꼰대‘라고 비하해 버리는 세태의 야박함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서는 마을의 노인 한 분이 죽게 되면 도서관 하나가 불탄 것과 마찬가지라며 크게 애도한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어른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것은 우리 사회의 급속한 변화와 관련이 깊다. 지식정보화 사회가 되면서 지식과 정보의 수명이 급속하게 줄어들고 있다. 그래서 어른들이나 기득권이 누렸던 독점적 지식은 이제 낡은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럴수록 변화의 물결을 살피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데, 대부분 적당히 안주하면서 과거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산다. 그래서 이제 그들이 우리 사회의 ‘도서관 역할’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면서 그들의 생각이나 행동 방식은 젊은 사람들에게는 낡은 것이 되어 버렸다. 그것뿐이 아니다. 나이들면서자신의 치열했던 삶을 포기하고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만다. 독재에 항거했던 시인은 권력과 화해하고 권력의 나팔수가 되었다. 노동자들의 열악한 작업 환경에 분노했던 청년시절의 의기를 버린 노회한 정치가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은 사회일수록 여전히 ‘꼰대논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 누가 ‘꼰대’인가. 그것은 나이에 따른 구분이 아닐 것이다. 사고와 행동이 구태의연한 사람이 꼰대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꼰대’에 관한 자료가 엄청나게 많았다. 이는 우리 사회에 여전히 ‘꼰대질’을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자료 중에는 ‘꼰대자가검정테스트 자료’도 있고,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한 다양한 방안 등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꼰대’의 본질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꼰대의 육하원칙’이 있는데, 이 자료에 비춰보면 자신이 꼰대인지 아닌지를 금방 알 수 있다.

Who(누가) : 내가 누군지 알고, When(언제) : 내가 왕년에, Where(어디서) : 어디서 감히, What(무엇을) : 네가 뭘 안다고?, How(어떻게) : 네가 어떻게 나한테, Why(왜) : 내가 그걸 왜 ?

여기에는 구체적인 대화 상황이 제시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전개될 대화 양상, 화자의 감정이나 태도를 우리는 선명하게 가늠할 수 있다.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대단한 자료다. 독자 여러분도 자신이 꼰대인지 아닌지를 금방 알게 해주는 자료 아닌가.

‘꼰대자가검정테스트’에 따라 설문 내용이 다소 차이는 있었지만, 공통점은 ‘나이부터 따지고 자기보다 나이가 어리면 대뜸 반말로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는 나이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방식에 대한 거부감이 잘 반영된 것이다. 사실 이런 사람 앞에서는 절대로 활발한 의견이 나오지 않는다. 받아쓰기와 눈치 보기만 있을 뿐이다. 자신은 항상 옳고, 혹 누가 문제점이라도 이야기하면 불평불만이라며 따돌린다. 어떤 현안이 생기면 사람들은 기존의 지식과 경험만을 강조한다. 과거의 사례를 언급하면서 사고의 확장을 방해한다. 이것이 바로 ‘꼰대질’이다. 서로 강요하거나 고집하지 않으면서 허심탄회하게 토론을 하다 보면 늘 놀라운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때마다 생각나는 한 마디가 있다. ‘함께 생각하는 것이 나 혼자의 생각보다 훨씬 본질적이고 전략적이다’라는 말이다.

최근 논란이 일고 있는 보수의 통합, 사법권의 독립, 유치원 교육에서도 ‘꼰대질’을 제거해야 한다. 지금까지 자신을 지키기에 바쁜 ‘꼰대질’로서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치를 존중하고 민의를 대변하는 보수여야 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사법부여야 한다. 자신의 재산을 투입한 점에서 사유재산이라 하더라도, 유치원은 국가의 미래역량을 키운다는 점에서 공적, 거시적 안목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자신의 품에 안고, 혼자만 독점하려는 것은 ’속 좁은 사람의 고집‘처럼 비쳐질 수 있다. ’내가 옳으니, 너는 따라와야 한다‘는 낡은 패러다임, 그 ’꼰대질‘로는 어떤 변화도 가져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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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인사이트 2018-11-02 12:45:06
아프리카에서는 마을의 노인 한 분이 죽게 되면 도서관 하나가 불탄 것과 마찬가지라며 크게 애도한다는데,

이 부분은, Amadou Hampâté Bâ라는 서아프리카 '말리' 출신의 작가가 한 말입니다.

아프리카(대륙)와 관련된 기사 중 일부는 55개의 국가로 이루어진 대륙으로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다양성을 가지고 있는 아프리카 지역을 하나로 일반화하는 표현이 많이 등장합니다. 저희 단체는 이런 일반화가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형성하며, 나아가 보다 객관적으로 아프리카 땅과 사람들을 바라보고 만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