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독재정권에 맞서 싸운 정화암
해방 후 독재정권에 맞서 싸운 정화암
  • 이종호 기자
  • 승인 2018.10.28 17: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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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 항일운동가 <6>
정화암의 스승이자 동료였던 이회영이 일경에 체포됐던 다련항의 현재 모습. 최광복 기자

 

 1921년에 망명해 해방을 맞을 때까지 중국에서 활동한 화암은 많은 동지들을 먼저 떠나보냈다. 처음으로 국경을 함께 넘었던 이종락을 비롯해 1924년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만들었던 이정규, 이을규 형제는 차례로 일제 경찰에 체포돼 국내로 압송된 후 옥고를 치렀다.

 1932년에는 화암에게 가장 가슴 아픈 사건이 발생한다.

 그의 동지이자 스승이던 우당 이회영이 일제가 점령한 만주에 독립운동의 거점을 마련하러 가던 중 대련에서 내부 밀고로 일제 경찰에 체포돼 66세를 일기로 파란 많은 일생을 마치게 된 것이다.

 구한말의 양반을 비롯한 지배층 권력은 대부분 나라를 잃고도 저항하는 대신 일제에 협력하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백사 이항복의 후손이며 대대로 정승과 판서를 지내왔던 명문가 집안이며 삼한갑족이라 불린 부유한 집안 출신인 이회영은 나라가 망하자 편안한 삶을 버리고 혹독한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이회영은 전 재산을 처분하고 일가를 이끌고 함께 만주로 이주했다.

 만주지역에서 무관학교를 꾸리기 위해서였다.

 만주지역에 무관학교를 설립하려는 계획은 1907년 발족한 비밀결사 신민회의 구상이었다. 이회영은 신민회의 창설멤버이자 핵심멤버였다.

 신민회는 해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기지를 창건해 적당한 때를 이용해 독립전쟁을 일으켜 무력으로 나라를 되찾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회영은 1907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그곳에 망명중인 평생지기 이상설과 만나 국내에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한 후 신민회를 조직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만주행을 결행한 것이다.

 이때 이회영은 가산을 모두 정리해 거금 40만원이란 현금을 마련했다.

 당시 쌀 한 섬이 3원씩 했으니 쌀값이 당시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지금의 비율로 따져도 수백억 원은 되는 거금이었다.

 이회영은 만주에서 독립운동 기지를 세우고 신흥무관학교에서 다수의 독립 운동가를 배출했다.

 그가 정화암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24년 재 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을 조직해서 아나키스트들과 손잡고 활동하던 무렵이다.

 이때부터 그는 스승이자 동지로서 청년 정화암이 무장 독립운동을 하는 데 도움을 주며 그의 사상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이회영은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간 만주에서 직접적인 독립운동을 하기위해 대련 항에서 배에 올랐다가 일경에 체포되면서 불굴의 의지로 이어가던 그의 행보는 막을 내린다.

 체포당시 이회영은 65세 노인의 몸으로 혹독한 고문을 받다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이 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정화암은 비밀리에 조사를 통해 밀고자를 처단하기도 했다.

 정화암은 이회영의 뒤를 이어 만주에서 민족해방운동 기지건설을 시도했다.

 하지만 실패해서 중국 관내로 철수했고, 생활난도 심한 상황에서도 독립운동을 끊임없이 전개했다.

 1945년 광복 이후 1946년 상하이한인인성학교 이사장, 상하이교민단 이사 등을 역임했다.

동방명주에서 바라본 주변 건물. 1994년 동방명주 건립 시작으로 상해는 개발붐이 일어 100층 이상의 건물이 주변에 빼곡이 차있다. 최광복 기자

 

 하지만 정화암이 몸담았다는 상하이 인성학교는 현재 개발사업이 진행되면서 헐리고 이곳에 상가가 들어서 있어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불굴의 투지로 일제의 만행에 무력으로 대항하면서도 후세들의 교육사업에도 힘썼던 정화암의 흔적을 찾을 수조차 없게 돼 아쉬움이 많이 남는 부분이다.

 그 후 귀국했지만 조국은 그가 꿈꾸던 조국이 아니었다. 30년 만에 다시 찾은 조국은 좌우의 대립 속에 조국은 분단돼 조국의 남쪽과 북쪽에는 나란히 독재정권이 수립됐다. 화암의 투쟁은 멈출 수 없었다. 화암은 다시 이승만의 독재에 맞선 싸움을 시작했다.

 해방 이후 정치인의 길을 간 독립운동가 출신 정화암은 수난을 꽤 당해왔다. 1960년 7월 7·29 총선거에서 고향 김제군 갑구 선거구에 사회대중당 소속으로 출마했을 때 상대 후보 조한백의 지지유세를 한 독립운동가 곽상훈(한국민주당 정치인 출신)으로부터 아나키스트란 이유로 공산주의자와 비슷하다는 비방을 받았다. 결국 이때 선거에서는 조한백에게 밀려서 낙선했다.

 곽상훈은 김제군 갑구에 출마한 조한백을 지원하는 연설을 했다. 이때 곽상훈은 상대방 후보인 정화암을 사상으로 공격했다. “정화암은 무정부주의자입니다. 공산주의의 사촌쯤인 무정부주의자에게 이 나라 정치를 어떻게 맡기겠습니까” 라고 비판했다.

 그러자 정화암은 ‘나는 곽상훈 씨를 위대한 정치가인 줄로 여겨왔다. 그런데 그 위대한 정치가가 무정부주의는 공산주의의 사촌쯤 된다고 말했다니 그 동안의 이 나라의 정치작태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무정부주의와 공산주의도 구별 못하는 사람이 위대한 정치가로 대접받아 왔으니 참으로 한심하다. 그런 소리는 이불 속에서 자기 마누라하고나 하시오. 유권자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면 곽상훈이라도 꽤 무식한 사람이구나 하는 말을 들을 뿐입니다.’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17,784표를 얻어 26,281표를 얻은 민주당 후보 조한백에게 2위로 석패했다.

 1년 뒤 5.16 군사정변 당시에 붙잡혀 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가 풀려났다.

상해 임시정부에 전시된 윤봉길 의사와 윤봉창 의사 의거 기록물. 하지만 정화암과 백정기 의사의 육삼정 의거에 대한 기록은 없다. 최광복 기자

 

 이후에 박정희 정권 당시 1969년에 실시한 3선 개헌에 항의하며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유신정권 치하의 1974년에는 민주화회복 국민선언에 참여하는 등 민주화 운동가로 활동하다가 1981년 10월 21일 85세를 일기로 한 많은 인생을 마감했다.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지난 후에야 대한민국 정부는 화암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평생을 해외에서 무장독립 운동을 벌였고 해방후에는 독재정권과 싸우면서 착취와 차별이 없는 자유로운 세상을 바라던 화암의 꿈은 이제 남은 자들의 몫이 됐다.

 하지만 화암의 뜨거운 조국애와 불의에 항거하는 투쟁정신은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끝>  

 

이종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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