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화암 정현섭의 삶
독립운동가 화암 정현섭의 삶
  • 이종호 기자
  • 승인 2018.09.20 17: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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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30주년 기념 기획취재] 독립운동가 화암 정현섭 선생 발길 뒤따르다[1]

  2019년이면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는다. 3.1운동을 계기로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도 100주년을 맞는다.

 전북도민일보는 올해 창간 30주년을 맞아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평생을 독립운동을 한 전북출신 항일운동가 화암 정현섭 선생이 걸었던 삶을 뒤따르며 그의 독립운동 행적을 재정리해 국가와 민족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계기를 만들고자 한다.

 3·1 운동 또는 3·1 만세 운동은 일제 강점기에 있던 한국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해 1919년 3월 1일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한국인들 스스로 민족의식을 깨우치는 계기를 마련했고, 조선의 멸망을 당연시하고 일본에게 긍정적이던 국내 체류 미국 선교사들의 시선을 개선시켰다.

 특히 민주 공화제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19세기 후반부터 이어져 온 근대 국민 국가 수립운동이 첫 결실을 맺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된 상해에서 전북 김제 출신의 화암 정현섭은 당시 열혈 독립단체였던 의열단, 애국단과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중심에 서서 주상해 일본공사 아리요시를 격살하기 위해 육삼정의거를 기획했으며 30여년 타국서 항일투쟁 펼치며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한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우리가 흔히 독립투사라고 하면 안중군, 윤봉창, 김구, 김좌진 등을 떠 올린다.

 하지만 우리에게 알려지지만 않았지 당시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위대한 업적을 남긴 독립투사가 우리고장 출신 항일운동가 화암 정현섭(1896~1981)이다.

 정화암은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하면서 항일 운동에 뛰어들었다.

 만세 시위에 참여한 뒤 1920년에는 미국 의회 사절단이 조선을 방문했을 때 이들에게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활동을 계획했다.

 이 때문에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되면서 1921년에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했다.

 1924년부터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회영, 신채호, 박열, 신성모 등 아나키즘 독립운동가들과 만나 함께 활동했다.

 이들과 같이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설립에 관여했다. 이때부터 무력을 사용한 독립 운동에 뜻을 두면서, 폭탄제조 기술을 습득하고 군자금 확보를 기도했다. 이무렵 중국의 혁명운동가인 리스쳉·우중후이등과 동방자유혁명자연맹을 조직했다.

 1928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계열이며 안중근의 동생인 안공근 등과 함께 재중국조선무정부의자연맹을 결성해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맹하고 기관지 《탈환》을 발행했다.

 상하이를 거점으로 무정부주의 운동을 계속하면서 1930년 유자명과 함께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조직하기도 했다.

 재중국무정부주의자 유기석을 만나 유자명·장도선·정해리 등과 중국인 무정부주의자와 함께 활동하며 공동 무력 투쟁을 시도했다.

 1931년 1월 원심창이 상해로 건너와 정화암과 합류하자 조직을 강화하고 상해 일대에서 친일파 및 전향자 등을 사살했다.

 1933년 3월 이강훈·원심창·백정기·유기문·이용준·진수방·전화민 등과 함께 청년들을 모아 상해해방연맹을 결성했다.

 1933년 3월 중순 일본 주중 상해공사 아리요시 아키라가 중국 유력자를 육삼정에 초청해 연회를 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본 공사를 사살하려고 계획했으나 밀정의 고발로 거사 직전에 검거됐다.

 

 1936년에는 국내 호서은행에서 5만 7천원을 탈취해 기관지 ≪남화통신≫을 창간, 발행기금으로 활용하고 남화통신을 통해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1940년부터는 상하이에서 광복군의 현지 책임자로 활동했다.

 태평양 전쟁 중에 포로수용소의 소재지를 정탐해 미국 공군에 보고하는 정보활동을 벌였다. 일본군으로 강제 징집된 조선인 학도병의 탈출 공작도 진행하고 탈출 학도병을 임시정부로 보내는 데 후원했다.

 1945년 광복 이후 정화암은 상하이 한인인성학교 이사장, 상하이교민단 이사 등을 역임했다. 그 후 귀국해 1958년 민권수호연맹 지도위원, 1959년 사회대중당 지도위원, 통사당 최고위원을 역임하고, 1960년 7·29 총선거에 출마했지만 선거 결과 1만7천784표를 얻어 2만6천281표를 얻은 민주당 후보 조한백에게 석패했다.

 그후 1961년 통일사회당 정치위원회 위원에 추대되었고, 5·16 군사정변으로 붙잡혀 6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풀려났다.

 1969년 3선개헌에 반대해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고문으로 참여했다.

 

 1973년 통일당 최고위원, 1974년 통일당 상임고문에 추대됐고 1974년 민주화회복 국민선언에 참여했다가 1981년 10월 21일 85세로 사망했다.

 1983년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에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저서로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 : 나의 회고록》, 《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가 있다.

이종호 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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