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칙어,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다
교육 칙어,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다
  • 정은균
  • 승인 2018.08.09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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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균의 학교뎐 10]
1911년 8월 23일 일제 강점 초기 조선 식민 교육의 틀을 규정한 <조선교육령>이 반포되었다. 일제는 <조선교육령>을 통해 조선어와 한문 독본을 제외한 모든 교과서를 ‘국어(일본어)’로 기술하게 하고, 지리와 역사 교육을 금지시켰다. 이로써 일제는 식민지 동화를 위한 교육정책의 대강을 마련하였다.

일제가 꼭두각시 어전회의에서 한일합방을 정식으로 의결하여 공포한 때가 1910년 8월 29일이었다. <조선교육령>은 그때부터 채 1년이 되지 않은 시점에 만들어졌다. 식민 교육을 통해 한국에 대한 통치의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일제의 노골적인 야심이 식민 통치 초창기부터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조선교육령>의 핵심이 제2조와 제3조에 있다고 본다. <조선교육령> 제2조와 제3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제2조 교육은 교육에 관한 칙어의 취지에 터하여, 충량한 국민을 육성하는 것을 본의로 한다.

제3조 교육은 시세와 민도에 적합하게 함을 기한다.

<조선교육령> 제2조와 제3조는 일제가 구현하려고 했던 조선 식민지 동화 교육정책의 목표와 방향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와 방향이 터 잡고 있는 것이, 제2조 전절에 명시적으로 밝혀 놓은 “교육에 관한 칙어”(아래 ‘교육 칙어’)였다.

교육 칙어는 1890년 10월 30일 메이지 천황이 총리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문부대신 요시카와 아키마사를 궁으로 불러들여 하사하면서 공식적으로 공표되었다. 이후 역사적으로 일제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기까지 일본 수신교과와 도덕교육의 기본 지침으로 쓰였고, 조선과 대만의 식민 교육을 규정한 <조선교육령>과 <대만교육령>의 기준이 되었다. 일본 근대교육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교육 칙어가, 절대적 권한을 가진 천황이라는 존재를 법률적으로 보증한 대일본제국헌법과 비슷하게 천황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하는 효과를 발휘했다고 본다.

교육 칙어에서는 신민의 충과 효를 바탕으로 만민의 마음을 하나로 하여 대대로 그 아름다움을 이루게 하는 것이 국체(國體)의 정화(精華)이자 교육의 연원(淵源)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부모에게 효도함, 형제 간 우애, 부부 화목, 친구 사이에 서로 믿음, 공손하고 겸손함,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함, 학문을 닦고 기술을 익힘, 지능을 계발함, 덕과 재능을 성취함, 공익을 널리 하여 세상 의무를 다함, 국헌 존중, 유사시 의용(義勇) 봉공(奉公) 등 12가지 도덕률을 나열하면서, 이를 통해 황운(皇運)을 보필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교육 칙어에서 나열하는 12가지 도덕률은 ‘아름답게’ 보인다. 그런데 교육 칙어에서는 12가지 도덕률을 길러 천황을 보필하는 일이 충량한[충성스럽고 선량한] 신민으로서 반드시 준수해야 할 일이라고 규정한다. 겉으로 아름다워 보이는 덕성을 기른 개인이 궁극적으로 천황의 운명[皇運]을 돕는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훌륭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교육 칙어에 담긴 교육이 개인이 국가에 종속되는 비인간적인 도구화 교육, 또는 각 개인 고유의 개성을 거세하는 획일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교육의 본보기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제 교육 칙어는 일제가 유례 없는 군국주의의 길을 걷는 데 핵심적인 이념 기반이 되었다. 아시아 식민 국가들에서 교육을 통한 통치술을 실행할 때 제일 기준으로 삼은 것도 교육 칙어였다. 나는 일제가 교육 칙어를 천황제 국가라는 국체와 식민 지배라는 통치 이데올로기의 교화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 고안한 방법을 두 가지로 정리하고 싶다. 교육 칙어를 받들어 잇기 위한 제반 의식 규정을 정비하여 이를 각급 학교에서 수행하도록 한 것이 첫 번째였다. 두 번째는 수신 교과를 교육과정의 핵심 지위로 격상시킨 일이었다.

교육 칙어가 학교 내 제반 의식에서 떠받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1891년 6월 17일 <소학교축일대제일의식규정>이 만들어지면서부터였다. 이 규정에는 기원절(紀元節; 일본 건국기념일), 천장절(天長節; 천황 탄생일), 원시제(元始祭; 천황 즉위를 기념해 천황이 직접 지내는 제사), 신상제(神嘗祭; 천황이 햅쌀을 이세신궁에 바치는 제사) 등 국가 기념일에 학교 의식을 치르면서 따라야 할 순서와 방법이 적시되어 있었다. 구체적으로 교육 칙어를 봉독하는 구체적인 절차와 칙어 내용을 바탕으로 한 훈시 강제, 기념의 종류와 의식의 내용 및 참가 대상 등이 담겼다.

수신(修身)은 교육 칙어의 출현에 따른 강경 보수 중심의 국가주의 교육과 봉건적인 천황제 교육을 뒷받침한 최상위 도구 교과였다. 일제는 교육 칙어 반포 직후인 1891년 11월 <소학교교칙대강>을 만들어 제2조에 “수신은 교육에 관한 칙어의 취지에 기초해서, 아동의 양심을 계발하고 기르며 그 덕성을 함양하고, 인간의 도리를 실천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을 요지로 한다”라고 규정했다. 그 뒤 수신 교과서 첫머리나 말미에 교육 칙어가 실릴 정도로 수신 교과는 교육 칙어를 전파하는 중요한 통로 구실을 담당했다.

1890년 1월 9일 도쿄 제일고등중학교 강당에서는 그 전 해 반포된 교육 칙어가 학교에 하사된 것을 기념하는 의식이 개최되었다. 칙어 봉독 절차가 끝난 후 교원과 학생들은 한 사람씩 앞으로 나아가 천황 부부 사진과 칙어에 경례를 하였다. 촉탁교원 우치무라 간조는 자신의 종교(기독교) 신념에 따라 칙어 앞에서 경례를 하지 않고 그대로 돌아 나왔다. 그것은 곧 ‘우치무라 간조 불경 사건’의 발단이 되었는데, 이 사건 이후 교육 칙어의 신성 불가침의 존재가 되었다. 이노우에 데쓰지로 도쿄제국대학교 문과대학 교수는 우치무라 간조 불경 사건을 다시 끄집어내 거대한 ‘교육 칙어 대 종교 논쟁’을 촉발시킨 한 평론에서 일본의 교육 칙어가 “국가주의인 동시에 애국주의”라고 정의했다.


정은균 군산 영광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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