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수합 서씨(令壽閤 徐氏)의 다시(茶詩)
영수합 서씨(令壽閤 徐氏)의 다시(茶詩)
  • 이창숙
  • 승인 2018.07.08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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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32>
영수합 서씨의 아들 홍석주 간찰, 초의가 보내준 차에 대한 감사글이 실려있다.
 4차산업 시대 우리에게 교육은 무엇인가. 교육의 목적이 직업이 된 지 오래되었다. 그러다 보니 인성이 강조되고 소통이 화두가 되었다. 소통은 무엇에 기반을 두는가. 우리는 누군가와 얼마나 소통을 하고 있나. 가족, 직장동료, 친구…. 등등. 소통은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 즉 배려하는 마음이다. 배려는 가족관계에서 출발한다. 어머니로서 교육관과 학문적 자질을 갖춘 인물로 평가되고 있는 영수합 서씨(令壽閤 徐氏, 1753~1823)의 가족 간의 소통법을 한번 살펴보자.

  그녀는 여류시인이며 문장가로 알려진 인물이다. 영수합은 부군(夫君) 홍인모(洪仁謨, 1755~1812)가 지어준 당호(堂號)이다.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이들은 당대 최고의 대학자이며 문장가이다. 그녀는 자녀들이 책 읽은 것을 직접 살폈으며 배운 것은 반드시 외우게 하였다. 자신도 직접 경전과 시문을 외워 매일 밤 가르쳤다. 잠들기 전에는 옛사람의 격언과 아름다운 모습을 들려주었다. 잘못 하였을 때는 회초리보다는 다정하게 타일렀다고 한다. 겨울 새벽까지 즐기는 독서와 거문고와 차가 있는 동야독서(冬夜讀書)라는 시가 있다.

 

 맑고 절절히 들리는 거문고 소리

 푸른 검은 기운이 적막하네.

 한밤중 내린 눈 매화나무 비껴있고

 달빛은 책상 위 책들을 비추네.

 

 여린 불은 느긋이 차를 끓이고

 데운 술은 은은한 향기 피우네.

 희미한 등불은 낡은 벽에 걸려있고

 어슴푸레한 새벽 서서히 밝아 오네.

 

  평상시 온 가족이 둘러앉아 차와 술을 즐기고 거문고를 타며 시를 짓고 읊는 것을 즐겼다. 이렇듯 부드러움과 강함을 지닌 여성 이었다. 여성에게 독서도 허용되지 않았던 시절에 친정 형제들의 어깨너머로 경서를 배웠다. 혼인한 뒤에 부군도 그녀의 학문을 높이 평가해 책 읽기와 글 짓는 것을 허락하였다. 하지만 남 앞에서 책을 읽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당시 벌열(閥閱)가문의 여성으로 스스로 규범을 철저히 지키려 노력했던것이다. 한번은 그녀의 남편이 지방에 근무하게 되었다. 저녁에 적적함을 달래고자 자녀들과 시회(詩會)를 열었다. 그녀의 문장 솜씨를 알고 있는 홍인모는 자녀들에게 어머니가 시를 읊으면 몰래 베껴놓으라고 지시했다. 수 백편이나 되는 시를 자녀들은 기록하였다. 그녀가 글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직접 시를 기록하는 것을 꺼렸으며 홍인모가 떠난 뒤에는 시를 짓지 않았다고 한다. 무슨 이유에서 일까? 어머니가 시를 읊고 자녀들이 그것을 받아 쓰고 훗날 남편의 시집에 남기니, 이렇듯 가족 간의 화목과 배려는 훌륭한 대문장가를 배출 한 것이다. 당시 여성이 시를 지어 시집을 출간한다는 것은 시회적 여건상 어려운 일이다. 그녀의 시는 홍인모의 문집 『족수당집』 제6권의 부록에 전한다. 시 191수 가운데 다시(茶詩) 몇 편이 있다.

  조선 사회가 후반부로 갈수록 가부장제가 확고해지고 여성들 특히 사대부가 여성들은 내외법이 강조되었다. 여성과 남성의 일이 엄격히 분리되어 여성들의 활동폭은 언제나 좁았다. 실학자였던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부인들은 마땅히 서경, 사기, 논어, 소학을 대강 읽거나 그 뜻을 통하고 여러 집안의 성씨, 선대의 족보, 역대의 나라 이름이나 성현의 이름 만 알면 될 뿐이지 함부로 글을 지어 외간에 알려서는 안 된다.”고 사소절(士小節)에서 밝히고 있다. 이렇듯 당시 여성들이 시를 지어 기록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가족들의 따뜻한 마음이 없었다면 오늘날 이 아름다운 시를 우리는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시중에 차를 시제(詩題)로 한 유일한 시 ‘고요한 밤에 차를 끓이며’라는 정야팽다(靜夜烹茶)라는 시가 있다.

 

 여러 해 동안 작은 화로에 차를 끓이니

 한점의 신령한 공덕 진정으로 있을 터요.

 맑은 차 마시고 거문고 어루만지니

 아름다운 달 보며 누구를 부를까.

 

 봄날 푸른 잔에 옥로차 더하니

 낡은 벽에 그을음 서려 그림 되었네.

 잔 가득 채울 것이 어찌 술뿐이겠는가

 답청가는 길 내일은 차호를 가져가리.

 

 / 글 = 이창숙 문화살림연구원 원장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은 격주 월요일자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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