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와 자기 밸러스트
차와 자기 밸러스트
  • 이창숙
  • 승인 2018.06.10 14: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30>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의 동양도자기 전시실에 많은 찻잔이 전시되어있다.
 유럽으로 차가 수입되기까지, 1840년 아편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 상인들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은 중국 광둥 지역으로 한정되었다. 차 무역은 영국령 동인도 회사에 의해 주도 되었다. 사실 유럽인들은 차나무가 어떻게 재배되며 차 제조기술이 어떠한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단지 무역을 통해 관례적으로 시음하며 품질을 확인하는 정도로 만족했다. 각 마을에는 중국 농부들이 생산한 차를 사들이는 구매자가 있었다. 지역 사무소에서는 사들인 차를 판매용 차로 분류하여 말이나 짐꾼들 편에 광둥으로 보냈다. 배로 운송되어 런던, 파리에 도착한 차는 다시 분류되어 혼합과정을 거친다. 그런 다음 경매에 부쳐졌다. 이때 상인들은 팔기 좋도록 작은 봉지에 차를 담아 소매상인들에게 넘긴다. 소매상인들은 차를 혼합하였는데, 부족한 찻잎의 양을 늘리기 위한 방법으로 다른 첨가물을 섞기도 했다. 차와 어울리는 독특한 향기를 내는 다른 관목의 잎, 오렌지, 레몬 등 합법적인 첨가물을 섞는가 하면, 그밖에 여러 가지 잎, 소나무 껍질, 청색 안료 등 불법적인 첨가물을 섞기도 했다. 지금의 베르가모트 향의 얼 그레이 홍차가 이러한 첨가물로 향을 내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면 조금은 아이러니컬하다. 여하튼 차양을 늘리기 위한 상인들의 수단이 ‘풍부한 향미’를 내는 홍차 블랜딩의 시초가 된 것이다.

 차와 함께 유입된 찻잔과 자기들은 유럽인들의 스타일에 맞는 큰 차 주전자와 찻잔으로 변신하게 된다. 차 무역은 유럽의 자기(磁器)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된다. 자기는 찻잔이나 차 주전자보다는 화물수송에 필요한 교역의 필수 조건 및 선체의 균형유지와 크게 관련이 된다. 자기는 섬세한 반투명의 세라믹으로 ‘차이나(china)’라 불렀다. 유럽에는 차이나를 발견하기 전부터 자기라는 뜻의 포슬린(porcelain)이 있었다. 자패(紫貝)의 섬세하고 매끄러운 반투명의 표면과 닮았다하여 붙인 이름이다. 차이나의 모조품 제작 시도가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 처음 시작되었으나 18세기 이전 까지는 자기를 만드는 고령토가 사용되지 않아 인기가 없었다.

 무역물품 중에는 물에 민감한 2가지 값비싼 상품이 포함되어있었다. 그것이 차와 비단이다. 차와 비단은 물에 젖지 않고 응결되거나 비에 젖지 않도록 선박의 중앙에 실어야 했다. 따라서 밸러스트 문제가 심각했다. 선체의 균형을 유지하고 순조롭게 항해하도록 부피는 줄이고 내수성이 있는 무거운 상품이나 밸러스트를 배 밑 만곡부에 실어야 했다. 밸러스트를 영구적으로 배 밑바닥에 싣고 다닐 수도 있었지만 이러한 물건(석탄·돌·쇠)들은 이득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래서 교역을 할 수 있는 무거운 상품을 찾았다. 그것이 자기였다. 선박들은 자기를 배 바닥 밸러스트로 실은 채 차를 실었다. 차의 총 수입양의 1/4 가량은 자기였다. 거대한 자기는 화물관리인의 손에서 다루어졌다. 관리인이 하는 일은 톤수가 맞는지 감독하는 것이었다. 톤수 조정 작업이 매우 번거로워 늘 부정이 뒤따랐다. 자기 품질은 좋았으나 가격은 저렴하였다. 톤수로 경중을 측정했다. 동인도 회사 선박의 기록에 의하면 1718년 20톤 분량의 찻잔과 접시 25만개(1개당 평균 2.8온스)가 주문되었다. 1724년에는 40톤 분량의 찻잔과 접시33만 2천개 (1개당 평균 4.3온스)가 주문되었다. 1732년에는 18톤 분량, 즉 17만 8천개의 찻잔과 접시(1개당 평균 3.6온스)가 주문되었다. 이 당시 유럽에는 끓이거나 뜨거운 물이 닿아도 변하지 않는 세라믹 항아리를 만들 수 있는 공장이 없었던 관계로 영국에서 설계되어 중국에서 제작되었다. 손잡이 없는 잔은 손잡이 달린 잔보다 상대적으로 배에 적재하기가 수월하였다. 초기 찻잔은 적재하기 쉽도록 제작되어 우아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손잡이 없는 뜨거운 찻잔 대신 다양한 디자인의 손잡이 달린 찻잔을 개발하게 된다. 1750년대 이후에는 중국에서 제작된 잔에 손잡이를 부착하게 된다. 손잡이를 제작하는 기술은 유럽에서 인정받는 직업이 되었다. 현재 우리에게 익숙한 손잡이 달린 멋진 홍차잔도 처음 중국에서 유입되었을 때는 손잡이 없는 찻잔이었다. 이는 유럽인들이 취향에 맞게 제작한 것이다.

 / 글 = 이창숙 문화살림연구원 원장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은 격주 월요일자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