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와 함께 유입된 찻잔과 자기들은 유럽인들의 스타일에 맞는 큰 차 주전자와 찻잔으로 변신하게 된다. 차 무역은 유럽의 자기(磁器)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된다. 자기는 찻잔이나 차 주전자보다는 화물수송에 필요한 교역의 필수 조건 및 선체의 균형유지와 크게 관련이 된다. 자기는 섬세한 반투명의 세라믹으로 ‘차이나(china)’라 불렀다. 유럽에는 차이나를 발견하기 전부터 자기라는 뜻의 포슬린(porcelain)이 있었다. 자패(紫貝)의 섬세하고 매끄러운 반투명의 표면과 닮았다하여 붙인 이름이다. 차이나의 모조품 제작 시도가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 처음 시작되었으나 18세기 이전 까지는 자기를 만드는 고령토가 사용되지 않아 인기가 없었다.
무역물품 중에는 물에 민감한 2가지 값비싼 상품이 포함되어있었다. 그것이 차와 비단이다. 차와 비단은 물에 젖지 않고 응결되거나 비에 젖지 않도록 선박의 중앙에 실어야 했다. 따라서 밸러스트 문제가 심각했다. 선체의 균형을 유지하고 순조롭게 항해하도록 부피는 줄이고 내수성이 있는 무거운 상품이나 밸러스트를 배 밑 만곡부에 실어야 했다. 밸러스트를 영구적으로 배 밑바닥에 싣고 다닐 수도 있었지만 이러한 물건(석탄·돌·쇠)들은 이득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래서 교역을 할 수 있는 무거운 상품을 찾았다. 그것이 자기였다. 선박들은 자기를 배 바닥 밸러스트로 실은 채 차를 실었다. 차의 총 수입양의 1/4 가량은 자기였다. 거대한 자기는 화물관리인의 손에서 다루어졌다. 관리인이 하는 일은 톤수가 맞는지 감독하는 것이었다. 톤수 조정 작업이 매우 번거로워 늘 부정이 뒤따랐다. 자기 품질은 좋았으나 가격은 저렴하였다. 톤수로 경중을 측정했다. 동인도 회사 선박의 기록에 의하면 1718년 20톤 분량의 찻잔과 접시 25만개(1개당 평균 2.8온스)가 주문되었다. 1724년에는 40톤 분량의 찻잔과 접시33만 2천개 (1개당 평균 4.3온스)가 주문되었다. 1732년에는 18톤 분량, 즉 17만 8천개의 찻잔과 접시(1개당 평균 3.6온스)가 주문되었다. 이 당시 유럽에는 끓이거나 뜨거운 물이 닿아도 변하지 않는 세라믹 항아리를 만들 수 있는 공장이 없었던 관계로 영국에서 설계되어 중국에서 제작되었다. 손잡이 없는 잔은 손잡이 달린 잔보다 상대적으로 배에 적재하기가 수월하였다. 초기 찻잔은 적재하기 쉽도록 제작되어 우아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손잡이 없는 뜨거운 찻잔 대신 다양한 디자인의 손잡이 달린 찻잔을 개발하게 된다. 1750년대 이후에는 중국에서 제작된 잔에 손잡이를 부착하게 된다. 손잡이를 제작하는 기술은 유럽에서 인정받는 직업이 되었다. 현재 우리에게 익숙한 손잡이 달린 멋진 홍차잔도 처음 중국에서 유입되었을 때는 손잡이 없는 찻잔이었다. 이는 유럽인들이 취향에 맞게 제작한 것이다.
/ 글 = 이창숙 문화살림연구원 원장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은 격주 월요일자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