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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지 않다
김동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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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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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이사상(不二思想)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말이다. 옛날 인도에서 코끼리 한 마리를 놓고 장님들 사이에서 서로 다른 말이 오갔다. 코끼리 다리를 만져본 이가 ‘나무 기둥 같다’고 했다. 그러자 배를 만져본 장님이 ‘벽’이라고 했다. 또 다른 장님은 꼬리를 만져보고 ‘아니야 밧줄(rope) 같다고 하였다. 코끼리는 분명 하나(一)인데,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다. 이들의 말은 모두 거짓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말이 모두 코끼리의 참모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처럼 ‘하나(一)이면서도 여럿(多)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결코 둘이 아니다. 중학교 시절의 내 사진을 보면서, 나는 그때와 같은 사람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인가? 그건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니 이 또한 불이(不二)요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세계다.

 노자 『도덕경』에서도 유(有)와 무(無), 어려움과 쉬움, 높고 낮음, 앞과 뒤, 화(禍)와 복(福)이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번뇌가 곧 보리(菩提)다’는 불경의 법문이나 ‘고통 속에 영광이 있다’는 성경의 말씀도, ‘번뇌’와 ‘보리’, ‘고통’과 ‘영광’이 서로 다르지 않는 불이적(不二的) 관계임을 깨우쳐 준 경구이다. 물이 얼음이 되고, 얼음이 곧 물이 되었다가 그것이 다시 수증기가 되어 날아가니, 세상의 모든 형상(形相)은 있다가도 없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세계이다. 무릇 드러나 있는 모든 형상에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니, 있고도 없고, 없고도 있는 유뮤불이(有無不二)의 세계다. 그러기에 얼음과 수증기는 물이면서도 물이 아니고, 그렇다고 얼음과 수증기를 물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불일불이·유뮤불이의 세계가 자연이고 우주의 본상이다.

 세상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유기체로서 우주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저마다 절대적 가치와 아름다움을 지니고 일다불이(一多不二)의 장엄한 화엄세계 속에서 서로 의존하여 존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불이사상은 주객일여의 세계관에 다름 아니다. 시인들이 사물을 분리하거나 현상에 집착하지 않고, 심미적 안목으로 그것을 유기체적 전체로 통찰하고 있음도 그것이다.

 사나이 가는 곳 어디나 고향인데(男兒到處是故鄕)

 그 누가 오래도록 객수에 젖어 있나(幾人長在客愁中)

 한 번 큰 소리로 천지를 뒤흔드니(一聲喝破三千界)

 눈 속에 복사꽃 편편이 흩날리네(雪裡桃花片片紅)

 -한용운, 「오도송 悟道頌」전문

 ‘객지’와 ‘고향’에 얽매이지 않고, ‘눈 속’에서도 ‘복사꽃’이 편편(片片)이 난다고 한다. 전주에서 만나면 남원이 고향이고, 서울에서 만나면 전라도가 고향이지만, 외국에서 만나면 코리아가 고향인데, 어찌 객지와 고향을 분별하고 봄과 겨울을 서로 다르다 구분하랴. 우리네 인생도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이 지구라는 행성에 잠시 나타났다 지나가는 나그네에 지나지 않는데, 고향과 객지를 어찌 나누어 구분하랴. 봄에 피는 꽃도 실은 겨울의 눈 속에서 살아남은 연기체인데 어찌 겨울의 눈보라와 봄날의 꽃을 나누어 가를 수 있느냐 반문하고 있다.

 눈앞에 현존하는 것들에 사로잡혀 그것이 근원적으로 무상하고 허망한 것임을 보지 못하고 집착하게 된다면, 우리네 삶은 수많은 갈등과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다고 하여 없음(無)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그저 허망하고 공허한 것이라고만 간주한다면, 이 또한 허무주의에 빠지게 될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의 근원을 보면 독립된 개체로 나누어져서 있지 않고 서로 연기되어 있다. 다만 인(因)과 연(緣)에 따라 한시적으로 한동안 어울려 있을 뿐이다. 때문에 너와 나, 유와 무, 생(生)과 사(死)의 양극단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유무불이(有無不二)의 중도(中道)에서 조화와 원융의 세계를 향하고 있음이 진정한 불이(不二)의 세계가 아닌가 한다.

 김동수<시인/미당문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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