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에 의한, 국가를 위한, 국가의 교육
국가에 의한, 국가를 위한, 국가의 교육
  • 정은균
  • 승인 2018.04.05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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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균의 학교뎐 3]
나는 앞 글에서 근대 학교의 이면에 숨어 있는 은밀한 비밀을 “근대 학교는 국가주의의 배양장이다”라는 거친 명제를 통해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이 명제는 근대 학교의 철학과 목표의 중심에 국가가 있으며, 학교교육이 당대 국가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짜여 운영되었음을 함의한다. 곧 국가에 의한, 국가를 위한, 국가의 교육이다.

대한제국 시기 고종은 각종 학교관제와 규칙 들을 통해 거국적인 근대 학교 시스템을 마련하려고 하였다. 1895년 교육조서를 공포하면서 “교육은 실로 국가를 보존하는 근본”이라며 교육입국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1899년에 “국가가 학교를 개설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장차 지견(知見)을 넓히고 진익(進益)을 구함으로써 물(物)을 열어 업(業)을 이루고, 용(用)을 이(利)하게 하여 생(生)을 후(厚)하게 하는 기본”이라며 국가 교육의 흥성을 독려하는 내용을 담은 조서를 재차 발표하였다.

대한제국 정부가 최고 통치자의 교육조서를 통해 거듭 강조한 교육철학과 목표는 국가를 위해 멸사봉공하는 인재 양성이었다. 이때 국가가 구상하고 기대한 인재상은 남성 엘리트였다. 1896년 5월 12일 당대 진보적인 민족 정신을 대변했던 <독립신문>이 정부가 학교를 세워 더욱 대대적으로 교육 사업을 펼칠 것을 주문하면서 “정부에서 사나이 아이들을 위하여 학교 하나를 세우면, 계집 아이들을 위해서 또 하나를 짓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꼬집은 사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당시 국가가 주도했던 근대 학교의 또 다른 정신을 국민 일반을 대상으로 한 보통교육, 곧 국민의무교육에서 찾을 수 있다. 보통교육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실시하는 일반적이고 기초적인 교육을 말하는데, 흔히 초.중등교육을 고등교육(대학교육)과, 일반교육을 전문교육과 대립하여 이해할 때 쓰는 개념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조선시대 서당을 보통교육기관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서당은 개인이 설립하고, 국민 일반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의미의 보통교육기관으로 보기 힘들다.

우리 역사에서 국가가 핵심 주체가 되어 보통교육 시스템을 마련한 최초의 시기는 1895년이었다. 이해 7월 19일 제정된 <소학교령>이 보통교육기관으로서의 소학교에 관한 법률적 근거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소학교령>에서는 심상 3개년, 고등 2~3개년으로 이루어진 5~6년제를 기본으로 학교 편제와 수업 연한, 교과목, 교과용 도서, 학령, 취학, 교원 자격과 임면, 경비 등에 관한 규정을 명문화하였다. 외형적으로 근대적인 국민의무교육제도의 기본 골격을 뒷받침하는 조항을 두루 포함하고 있었다.

이 시기 소학교가 갖는 보통교육기관이나 국민의무교육기관으로서의 성격은 제1조의 ‘목적’에 뚜렷이 나와 있다. “아동 신체의 발달에 감(鑑)하여(살펴) 국민교육의 기초와 그 생활상에 필요한 보통지식 및 기능을 줌을 본지(本旨, 근본 뜻)로 한다”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특별히 기억해야 할 점은 우리나라 보통교육의 효시인 소학교가 일본의 그것을 그대로 본뜬 바탕 위에서 세워졌다는 사실이다. 1886년 공포된 일본 <소학교령>의 기본 편제(심상과 고등의 구별)와 목적(“아동 신체의 발달에 유의하여 도덕교육 및 국민교육의 기초와 생활에 필수되는 보통지식과 기능을 줌으로써 본지를 삼는다”)이 그대로 우리 <소학교령>에 들어와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학교 경험이 외래 시스템인 일본 학제의 ‘복붙’처럼 이루어진 역사적 사실은 잘못 끼워진 첫 단추였다. 정치사회적인 혼돈의 시간이 계속 이어지면서 꼬여버린 첫 단추는 영영 제 구멍을 찾지 못하게 된다. 1905년 강제적으로 체결된 을사늑약에 따라 일본은 우리나라 외교권을 빼앗고 내정 장악을 위한 통감부 설치의 근거를 마련한다. <황성신문>이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이라는 의분에 찬 논설을 통해 망국민의 감정을 토로하고, 백의를 입은 우국지사들의 비분강개가 광화문에 울려퍼졌으나 망국의 비류를 막을 방도는 없었다.

을사늑약으로 정식 식민 통치를 위한 기반을 닦은 일본은 곧장 1906년 <사범학교령>과 <보통학교령> 등 각종 학제를 개편하는 법령과 시행규칙을 공포하였다. 기존에 초등교육을 담당했던 ‘소학교’를 ‘보통학교’로 개칭하면서 편성과 수업 연한을 크게 정리하였다. 각 학년 교과과정에 일본어를 조선어와 마찬가지로 6시간씩 배당함으로써 식민지 속국화를 위한 교육제도를 마련하는 일에 노골적인 열성을 보였다.

그 모든 일은 당대 교육정책을 세우고 행정사무를 실질적으로 관장했던 통감부가 지휘하였다. 우리 정부에 교육 부문을 담당한 학부가 있었으나 그들은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와 다름없었다. 이는 1909년 당시 학부 본청의 직원 78명 중 절반에 가까운 37명이 일본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점을 통해서도 방증된다.

우리는 식민화를 위한 일본의 교육정책을 정확하게 간파하기 위해 표면의 명분과 이면의 진의를 냉철하게 분리해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은 근대 학교를 실질적으로 운영한다는 미명 아래 고종이 마련한 우리 식의 신학제 시스템을 폄하하면서 일본인 교원을 관공립학교에 배치하여 교육 책임을 맡긴다는 교육 계획을 밝혔다.

일본은 학부를 통해 이러한 교육에 ‘모범교육’이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그리고 이러한 모범 교육에 따라 친일 교육을 효과적으로 펼치기 위해 전임 교장이 따로 없었던 당시 관공립보통학교와 사립학교에 일본인 교감을 두는 방식으로 학교권력 재편 작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또한 천황의 생일 잔치인 천장절(天長節) 축하식을 학교에서 거행하게 하여 천황 만세 삼창을 외치고 일장기를 흔들게 하는 등 상징화 교육을 펼쳤다. 그렇게 하여 조선의 학교는 조만간 일본발 국가주의를 살찌우는 거대한 배양장이 되고 말았다.


 정은균 군산 영광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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