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장군의 혼이 담긴 서예작품<1>
안중근 장군의 혼이 담긴 서예작품<1>
  • 원암 오광석
  • 승인 2018.04.03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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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는 안중근 장군의 순국 108주년이다.

 안중근 의사(義士)로 더 알려졌지만 당시 대한의군(大韓義軍) 참모중장(參謀中將) 자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으니 장군이라 호칭한다.

 장군이 태어나서(1879년) 순국(1910년 3월 26일)할 때까지의 대한제국은 국내외적으로 큰 혼란기였다. 대륙(大陸)으로 진출하려는 일본이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후 우리나라를 지배하기 시작하더니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시작으로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탈해 버렸다.

 장군은 1909년 2월 7일에 함께 의병(義兵)활동을 하였던 김기룡, 강순기 등 뜻이 맞는 동지 11명과 손가락을 절단하는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행하였고 “국권회복을 위하여 죽음으로써 투쟁 할 것”을 맹세하였다.

 때 마침 그해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상과 회담하러 만주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국권피탈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기로 결의 하였다.

 장군은 1909년10월26일 하얼빈역 앞에서 러시아군의 군례(軍禮)를 받고 출영객들로 부터 인사를 받는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사살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대한만세!”를 외친 후 현장에서 러시아군 헌병에게 잡혀 일본 관헌에게 넘겨졌다.

 장군은 하얼빈 총영사관 지하실 감방에서 1차 조사를 받은 후 11월3일에 여순 감옥(旅順監獄)에 이송 수감 되었다.

 사건이 러시아 땅에서 일어났고 장군이 한국인이기 때문에 사실 재판이 무효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마음대로 일본형법에 의해 재판을 하였으며 1910년2월14일에 그 들은 장군에게 사형(死刑)을 선고 하였다.

 장군은 항소를 할 수 있었는데도 항소를 하지 않았다. 장군의 어머니께서도 아들이 사형선고를 받자 급히 두 동생을 보내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떳떳하게 죽는 것이 어머니에 대한 효도이다”라고 전했다. 정말 훌륭한 어머니에 훌륭한 자식이 아닐 수 없다.

 장군은 사형을 선고 받은 지 40여 일이 지난 1910년 3월26일에 고향에서 보내온 흰색 명주 한복으로 갈아입고 교수형에 처해 졌다.

 장군은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게 행동하였고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고 도저히 믿기 어려울 정도로 침착하고 차분하게 자서전(自敍傳)을 집필하고 서예에 심취 하였다. 특히 서예작품은 사형을 선고 받고 스스로 항소를 포기하고 의연히 글씨 쓰는 장군의 모습과 사상에 일본 관리들이 그를 존경하게 되었으며 비단과 종이를 사 넣으며 글씨를 부탁하였다.

 처음에는 사양하였으나 붓글씨를 통해 장군이 의거한 이유를 일본인들에게 전파하여 되새겨 줄 계기가 되리라 생각하고 써주었다.

 그래서 장군의 유묵(遺墨)을 받은 사람은 모두 일본 사람들이며 약200여장을 휘호 하였고 현재 확인되는 것은 약60여점 정도이다.

 장군의 고귀한 유묵들 중에서 현재 26점은 국가에서 보물569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글 = 원암 오광석(전북미술협회 서예분과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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