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암 장애인복지관 개관 30주년의 의미
동암 장애인복지관 개관 30주년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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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4.03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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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4일은 사회복지법인 동암이 개관한 지 30년이 되는 날이다. 척박한 땅에 장애인복지라는 나무를 심은 지 꽤 많은 세월이 흘렀다. ‘동암’의 30주년이란 숫자는 정상인의 그 세월과 다르다. 그 이면에 우여곡절과 눈물, 그리고 땀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동암의 정문을 넘나든 심신장애인들이 인간답게 살아보겠다는 일념으로 고난의 언덕을 오르내렸다. 아니 휠체어에 희망을 싣고 다녔다. 양복규 대표가 일궈 놓은 ‘동암’의 건물을 보면 그의 몸이고 영혼으로 보인다. 동암고, 사회복지법인 동암, 동암재활원, 동암차돌학교(초·중·고), 동암장학재단, 동암자활자립장 등 많은 기관을 보면서 그의 헌신과 정성을 가늠해 본다.  

 1980년 당시로 돌아가 본다. 그때는 UN이 정한 ‘장애인의 해’로써 우리나라에 장애인복지를 눈뜨게 한 시기이다. 정부는 국가복지정책의 일환으로 1982년 서울장애인복지관을 설치했다. 이후 전국 광역시·도는 관내 1개소 이상 장애인복지관을 설치하도록 독려했다. 그러나 전북도는 마땅한 독지가가 나타나지 않아 몇 년의 세월을 흘러 보내야만 했다. 1986년 전북도는 정부로부터 교부 받은 장애인복지관 건축비를 반납해야 할 위기에 처했다. 이때 동암 양복규 대표가 나타났다. 현시가로 650억 원 가량 되는 6,540평을 기부했다. 전북도 당국은 가까스로 지역의 체면을 세울 수 있었다. 중앙정부가 선도하는 장애인복지관 설립을 우리 전북에도 세울 수 있게 돼 도민은 물론, 장애인들이 크게 환호했다.  

 수년 전 양복규 대표는 ‘산속에 버려버리라 했던 장애인, 동암 양복규’라는 책을 썼다. 책자의 제목처럼 그는 버림을 받을 만큼 신체장애가 컸다. 하지만 그가 극도의 고난을 극복하고 정상인도 할 수 없는 이런 과업을 성취해 냈다. 지금의 이 상황을 보면 기적이나 다름이 없다. 설립 당시 일부 사람들이 모함하거나 폄하를 할 때도 그의 의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산속에 버려져야 할 그가 더 이상 뭐가 아깝고 아쉬울 게 있었을까. 그의 인간 존엄과 장애인에 대한 애정은 ‘동암정신’으로 재조명돼야 한다. 전북도는 범도민 차원에서 개관 30주년의 의미를 갖도록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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