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설헌의 봄날의 차
허난설헌의 봄날의 차
  • 이창숙
  • 승인 2018.03.16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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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25>
단원 김홍도 - 안정도(安正圖)
 마실 차가 떨어지고 차향이 그리워질 쯤 이면 봄이 왔음을 안다. 매년 찾아오는 봄인데 맞이하는 마음은 사뭇 다르다. 올겨울은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내려 차나무가 얼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찻잎이 무사히 필지, 언제쯤 필지... 차 향기 그립다. 이렇게 내 마음속에 느끼는 차는 매년 세상 밖으로 나와 다정한 누군가의 곁으로 다가간다. 갈증을 느낄 때,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을 때 이 모두 차와 함께 누리는 시간이다.

  봄날 한 폭의 그림을 연상하는 조선중기 여류 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의 춘경(春景)이라는 차시(茶詩)가 있다.

 

 정자는 산 이름이라 내 마음에 있고

 내 마음 어디 있는가, 숲속에 있네.

 차 연기 긴 봄날에 피어오르고

 꽃 그림자 군데군데 그늘지어 노니는 구나.

 가득 부은 찻잔에 개미 들었다고 어찌 청탁을 논하랴

 발 옆에 제비는 장단 맞춰 지저귀누나.

 봄맞이 걸음마다 구름은 디딜자리 만들고

 시냇물 따라 꺾인 길은 깊이 온줄 모르네.

 

  자유로운 세계에 대한 갈망과 외로움, 자연과 더불어 자신의 마음을 섬세하게 표현한 시이다. 타고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남편과의 불화와 고부간의 갈등, 자녀들의 죽음, 그녀의 짧은 생애는 더없이 불운했다. 작가이며 화가이기도 한 그녀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누나이다. 죽기 전에 방안에 있던 작품들을 모두 소각하였다. 친정에 있던 작품들도 소각하라는 유언을 남기지만 동생 허균이 이를 보관하여 후일에 출간하게 된다. 그녀의 작품이 명나라 작가들에게 알려지고 극찬을 받는다. 허균은 명나라 시인 주지번과 양유년에게 서문을 받아 시집 『난설헌집』을 출간한다. 중국과 일본 그리고 조선에서 그녀의 작품이 간행되고 전해져 국제적으로 알려지고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조선조 사회에서 여성들의 작품 활동은 극히 제한되어있었다. 자신을 드러내는데 소극적일 수밖에 없던 시절, 유교사회에서 남녀불평등에 반기를 든 여성의 주체성을 드러낸 시인으로 유명하다. 그녀의 시 「유선사 17(遊仙詞 十七)」에 ‘여신선이 홀로 사는 것을 옥황상제 부인이 가엽게 여겨 그녀를 허상서에게 시집 보내준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렇듯 당시 ‘재혼 규제법’ ‘내외법’으로 인해 갇혀진 여성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시속에서 드러낸 것이다. 아름다운 시만큼 자신은 너무나 외로웠던 시인 허난설헌 그녀는 시를 통해 유교사회의 모순과 남녀평등을 주장하였다. 또한 겉으로 화려한 궁녀들의 고된 삶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궁사20수(宮詞 二十首)」가 있다. 이중에 차와 관련된 일을 읊은 시가 있다.

 

 붉은 비단 보자기에 건계차 싸서

 시녀는 꽃모양으로 묶어 봉한 뒤.

 붉은 인주로 비스듬이 ‘勅’자를 눌러

 내관들이 대신들 집에 나누어 보내네.

 

 궁녀들이 중국의 건계차를 붉은 보자기에 싸서 대신들에게 선물로 보내는 모습을 담은 시이다. 건계차는 중국의 복건성 건안의 동계에서 나는 고급차이다. 사대부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던 모양이다. 그녀의 눈에는 대신들에게 선물로 보내기 위해 중국차를 포장하는 궁녀들의 모습이 어찌 보였을까. 이일이 비단 즐겁게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조선조 문사들의 시와 편지에 차에 대한 기록이 다수 있어 당시의 차문화를 그려볼 수 있다. 하지만 여성들의 차에 대한 자료는 찾기가 쉽지 않다. 허난설헌의 작품 속에 차가 등장하여 당시의 상황을 조금은 그려 볼 수 있다.

 

 / 글 = 이창숙 문화살림연구원 원장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은 격주 월요일자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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