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호남의 여러 고을에서 차나무가 자란다. 우리의 풍습은 작설(雀舌)을 사용하여 약에 넣기도 했다. 대부분 찻잎과 작설이 본래 같은 것 인줄 몰랐다. 예전부터 찻잎을 채취하여 차를 만들어 마시는 자가 드물었다. 차를 좋아하는 이들이 중국에서 사 가지고 올망정, 나라 안에서 만들어 마실 줄을 모른 것이다. 경진 년(1760년) 배가 표류하여 남해에 들어왔다. 배 안에 중국차가 들어있어 비로소 차의 생김새를 알게 됐다. 10년간 차를 실컷 먹고 떨어진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차를 만들어 마실 줄을 모른 것이다. 비록 찻잎을 모두 취하여 이익을 독점한다 해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서북 지역에 시장이 열리는데, 그곳으로 운반하여 차를 은과 바꾸고 다시 말과 교역한다면 목장에 말이 넘쳐 날것이다. 차는 비단과도 바꿀 수가 있다. 이렇게 하면 나라의 재정이 조금나아지고 백성의 고달픔도 줄어질 것이다. 황량한 벌판에 절로 피고 지는 초목을 얻어 나라에 보탬이 되고 백성들의 살림이 넉넉해질 수 있다고 말한 것은 과한 것은 아니다.”고 피력했다.
이처럼 그의 글은 참으로 조심스럽고 구체적이다. 차가 중국에서 어떻게 북방의 이민족에게 보급되었는지, 교역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밝히고 있다. 중국의 차는 신농씨 때부터 세상에 알려져 위진 시대에 이르러 성행한다. 당나라와 송나라를 거쳐 차를 만드는 솜씨가 점차 정교해져 천하의 맛이 되었다. 이에 모든 사람들이 차를 마시고 마시지 않는 나라가 없게 되었다. 북쪽의 이민족은 차가 생산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항상 고기와 유락을 먹고 살기에 배병이 났다. 비타민 공급과 병을 예방하기 위해 차는 생필품이 되었다. 그들은 차를 구하기 위해 중국과의 거래에서 늘 밀렸다. 송나라가 금을 견제하고 명나라가 후금의 삼관을 누른 것도 차가 있어 가능했다. 이에 우리도 차 한 냥에 2전의 은만 받으면 10만근의 차로 2만전의 은을 얻을 수 있다. 돈으로 환산하면 60만전이 된다. 이를 재원으로 둔전(屯田)을 설치할 수 있다고도 제안한다.
사실 그 당시 백성들은 차가 무엇인지 어떻게 만들고 마시며 써야 할지도 몰랐다. 이에 국가가 차를 모두 거두어 이것을 북쪽의 이민족과 거래를 한다면 나라와 백성들의 살림이 넉넉해질 거라는 제안을 한 것이다. 그는 차를 만들 때도 향약을 넣어 만든 떡차는 제작에 비용이 많이 든다며, 잘못된 것을 넣어 만드는 것보다는 순수한 찻잎만으로 떡차를 만드는 것이 좋다고 했다. 또한 어떤 이는 우리의 차가 중국의 차보다 못하다고 하나 내가 보기에 색과 향기와 기운과 맛이 조금도 차이가 없다. 오히려 우리의 차는 맛도 좋고 약용으로도 좋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우리나라 귀족이 잔치를 열어 차에 꿀을 타서 내왔는데 사람들이 참으로 훌륭한 맛이라고 했지만, 자신은 차마 입을 대고 마실 수가 없었다고 소개한다. 이 모두 차에 대한 무지에서 온 것으로 이렇게 마실 바에는 차라리 차를 마시지 않는 편이 좋다고도 했다. 아마도 이덕리는 귀족이 내놓은 차가 중국차여서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 글 = 이창숙 문화살림연구원 원장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은 격주 월요일자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