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신계(茶信契)
다신계(茶信契)
  • 이창숙
  • 승인 2018.01.19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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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21>
차꽃은 10월 중순에서 11월 초 사이에 핀다.
 다산이 18년간의 귀양살이가 풀려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자 1818년 8월 그믐날 여러 제자들과 계를 묶었다. 이것이 「다신계 절목」이다. 차례로 적은 목록에는 제자들의 이름과 지켜야할 일 들이 적혀있다. 18명의 제자들 속에는 다산의 큰 아들 정학연(丁學淵)도 들어있다. 서문을 보면 사람이 귀중한 것은 신의(信義)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모여서 즐기다가 흩어지고 서로 잊는 다면 이는 새나 짐승과 다를 바 없다. 1808년 봄부터 1818년까지 서로 형제와 같이 글공부를 하고 글을 지었다. 지금 스승께서 고향으로 돌아가시니 우리들이 뿔뿔이 헤어져 서로를 잊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신의를 익히는 도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일을 염려하여 돈을 모아 계를 만들었다. 앞날의 신의를 익히는 자본으로 만들고자한다는 내용이다.

  약조(約條)는 8가지 항목으로 되어있다. 이 중에 곡우와 입하에 차를 만들라는 당부의 내용이 있다. “매년 청명이나 한식날 계원은 모여 다신계를 열어 시를 읊어 이름과 작품을 써서 정학연에게 보낸다. 다신계를 여는 날에는 생선 값은 곗돈에서 지급하고 쌀은 각자 가지고 온다. 곡우날에는 찻잎을 따서 차를 1근 만들고, 입하 날에는 떡차 2근을 만든다. 만든 엽차 1근과 떡차 2근과 시와 편지를 같이 부친다. 그밖에도 찻잎을 채취하는 일은 각자 스스로하며 맡은 양을 준비해야한다. 만약 준비하지 못할 경우 돈 5푼을 윤종진(尹鍾軫)에게 주어 귤동의 아이들을 고용해 찻잎을 채취해 찻잎의 양을 채우게 한다.” 특히 마지막 구절에는 “비용을 쓰고도 돈이 남는 다면 착실한 계원에게 이자를 불리되 1명이 2냥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 돈이 20냥이 차면 곧 논을 사서 다신계 재산에 붙인다.”는 조항도 있다. 다산이 강진에서 강학하면서 제자들과 살아온 모습을 볼 수 있는 내용이다. 참으로 자상하고 청렴하고자 노력한 대목이다. 특히 차를 만드는 일에 많은 신경을 썼던 것 같다. 찻잎의 양까지 챙기는 것을 보면 매년 제자들과 차를 만들고 마셨던 것 같다.

  정학연의 『종축회통』에도 차나무 재배방법과 차를 저장하는 방법을 기록하고 있다. 차 씨는 여물었을 때 따서 젖은 모래흙과 섞어 대바구니에 담아 짚으로 덮어둔다. 이렇게 해야 얼지 않고 살 수 있다. 음력2월에 꺼내 나무아래 응달진 곳에 심는다. 차를 갈무리하는 경우 주석으로 된 병에 넣어두면 차의 색과 향이 1년이 지나도 한결 같다고 한다. 이 또한 다산의 차에 대한 지혜일 것이다. 반산 정수칠(丁修七)이 다산 정약용(丁若鏞)에게 글공부를 배울 때 일이다. ‘제가 공부를 좀 하려거나, 바른 행실을 하려하면 사람들이 색안경을 쓰고 봅니다. 제가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하고 묻자. 다산은 “사람들은 원래 말이 많네. 남의 선행에 대해 속셈이 있다고 보고, 효행이나 청렴도 속셈이 따로 있다고 보는 눈들이 많지. 참으로 무서운 세상이야. 옳은 일이지만 눈치를 보느라 옳은 일을 뒤로하고 악한 일을 따른다면 그것이 옳은 일이겠는가? 자네의 마음 또한 편하겠는가?” 임금 앞에서 바른말로 간쟁하던 충실한 신하에게는 간신배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법이라는 말까지 한다. 이렇게 다산은 제자의 마음을 다독거리며 든든한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다산이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 제자들이 스승을 찾아뵈러 왔을 때 써준 증언에는 “죽은 사람이 살아나더라도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어야한다”고 당부를 한다. 해배가 된 후에도 제자들의 마음 챙김은 계속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가끔 함정에 빠진다.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어찌해야 할지. 옳은 일에도 잠시 머뭇거린다. 주변에서 지켜보는 눈길 때문일까. 결과만을 생각하는 교육의 함정 탓일까. 100세 시대, 좀 길게 사는 세상에서 마음 챙기는 방법은 무엇일까. 요즘은 인터넷이 교과서이고 정보이고 스승이 된듯하다. 소통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하루 중 몇 시간 만 이라도 스마트폰을 서랍에 넣어두고 차를 마시며 사숙(私淑)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보면 어떨까싶다.

 

 / 글 = 이창숙 문화살림연구원 원장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은 격주 월요일자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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